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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2 인터뷰

술 한 잔 청포도의 맛

2021.06.13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것은 분명 청포도 맛이었다.
“청포도 맛이 난다고? 신기하네….”라고 은송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응, 정말 청포도 맛이 나. 연두색의 말캉한 포도 알맹이를 삼키고, 씨를 씹었을 때 느껴지는 그 달콤 쌉싸름한 맛 있잖아.” 나로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술의 맛과 향이었다. 확실한 사실은 그 술에는 인공감미료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술은 은송이 직접 빚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 술에서 청포도맛이 느껴진 것일까?


은송은 재주가 많다. 농부 시장에서 5년간 일한 덕분에 전통주를 비롯해 다양한 식재료를 잘 이해하고 있다. 요가나 달리기처럼 몸 쓰는 일도 열심히 한다. ‘대한민국 100대 명반’을 다 들어보았을 정도로 1980~90년대 음악도 좋아한다. 요즘은 식물에 빠져 있는 듯하다. 다만 그게 전문가라고 할 만큼은 아니어서 스스로 ‘다재무능’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하는데,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 아닐까. 나는 종종 생기를 느끼고 싶을 때 은송의 집을 찾고, 그곳에 가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사치스러운 은송이 있다.

해가 잘 드는 이 집은 참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
영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런던의 채광 좋은 집들을 보면서 결심했어. 다음엔 무조건 햇빛이 잘드는 집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사 준비를 시작했지. 반지하에서 3년가량 살았으니까 때마침 이사할 때도 됐었고. 주위 친구들도 하나둘 전셋집으로 옮기기 시작하던 시기였어.



반지하가 꼭 나쁜 건 아니잖아.
맞아, 3년 정도 살면서 꽤 만족스러웠어. 경사지에 있어서 1층이나 다름없었거든. 하지만 지대가 낮으니까 해가 짧게 들었어. 그리고 부엌 외에 거실이 따로 없어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지. 방에선 잠만 자고, 거실에선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게 전부였거든.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거실을 꼭 갖고 싶었어. ‘햇빛과 거실’ 그 두 가지만 보고 이사를 결심했어.


너는 뜨개질도 하고, 요리도 하고, 요즘은 전통주 빚는 재미에 빠졌잖아. 손재주가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의식주를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도시에선 다 돈으로 해결할수 있지만 원래는 직접 하는 일이잖아. 집도, 옷도, 술도 직접 만들던 인간적인 감각을 도시에 살면서도 이어가고 싶은 것 같아. 어느 날 갑자기 재난이 닥쳐서 대량생산 기술을 가동할 수 없을 때를 떠올리며 필수적인 1차 생산 활동을 배워놓고 싶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손으로 하자.’는 마인드야.

자신의 집을 좋아하는 걸로 가득 채우는 게 진정한 사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너는 사치스러운 사람 같아.
돈을 쓰더라도 좋아하는 것들에 더 쓰게 돼. 음식 배달이나 물건 택배를 잘 안 시켜. 옷이나 가구도 중고를 좋아하고. 주위에서도 많이 얻다 보니 큰 물건을 내 돈 주고 살 일이 없었어. 이것저것 물건이 많은 집 치고 생각보다는 돈을 많이 안 쓴 편인데, 이제는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으로 하나씩 바꿔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유연하게 살기 위한 너의 힘 빼기 기술은 뭐야?
나는 조급하면 무언가를 하는 편이어서 몸의 힘을 빼는 게 좋아. 요즘 매일 요가를 하는데 몸의 힘이 다 빠져서 가만히 있어도 좋아. 그중에서도 물구나무서기에 도전하고 있는데, 혼자서 하고 싶은데 못 하거든. 그런데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못 하는 거예요.”라고 하셨어. 사실 알고 보면 되게 쉬운 건데, 나중에 하게 되면 어이없을 거라고. 실제로 몸의 온갖 근육을 다 쓰니까 ‘어떻게 여기가 아프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몸 구석구석 한 번씩 다 아팠어. 내 몸에 그동안 몰랐던 근육들이 많이 붙어 있다는 발견의 연속이야.



마지막으로, 너를 술에 비유해줘.
산미가 약간 느껴지는 약주랄까. 찐득하고 농익은, 오래 숙성된 맛이 느껴지는. 가장 좋아하는 술은 ‘장성만리’라는 술인데, 과일 향 같은 산미가 좀 있어. 단맛만 있으면 또 질리잖아. 음식에도 산미가 더해지면 더 맛있게 느껴지듯 입맛을 돌게 하는 적당한 신맛이 느껴지는 술. 도수는 18도 정도로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묵직한 술이라고 해둘게.


글. 정규환 |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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