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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7 인터뷰

홍은동의 라라랜드 1

2020.10.30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집을 나설 때 피아노 소리를 들었어요.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경쾌한 소리. ‘지나가는 사람 가득히 저마다 맘속에 레미레레 노래 부르는’이라는 가수 권나무의 ‘어릴 때’ 노랫말이 떠올랐어요. 어떤 친구를 만날 땐 꼭 유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나요? 그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엔 머릿속에 음표들이 가득합니다. 포방터시장 돈가스집이 유명해지기 전 서울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홍은동. 동서로 길게 뻗은 홍은동은 어느 동네와도 닮지 않은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딘가 예스러운 동네 모습처럼 이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순수를 간직한 듯했습니다. 서울의 편리함과 화려함을 좇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휴식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 제 친구 민영이도 이런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고 지금 맞는 길로 잘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 7612 버스 종점에서 언덕을 조금 더 올라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다 보면 민영이의 집이 나옵니다.

우리는 반찬 모임 ‘냠냠반찬’을 하면서 알게 됐어.
‘냠냠반찬’은 정기적으로 친구들과 모여 요리를 하는 모임이었잖아. 우리 또래 중 1인 가구가 많은데 자취를 오래 하다 보니 음식을 직접 만들고, 제철 음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시장에서 바로 구입한 신선한 재료로 요리하고 자연스럽게 반찬 레시피도 배우게 되어서 좋았어. 이 모임을 하며 인스턴트와 배달 음식 일색이던 내 자취 생활의 먹거리가 다양해졌지.

또 친구들의 집을 보면서 서로의 일상에 더 맞닿은 기분이 들었어.
주로 양천구 목동을 중심으로 모였잖아. 목동에 사는 친구의 집이 가장 넓었기 때문이지. 모임을 준비하면서 장 보는 시간이 참 좋았어. 친구의 스쿠터를 함께 타고 시장에 가서 채소를 고르는 순간이 행복했지. 친구들이 채식과 환경보호에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잖아. 장을 볼 때도 일회용 포장재를 상인들에게 돌려주곤 했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했어.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함께 음식을 만들고 먹으면서 가족이 된 기분도 들었어. 그리고 반찬이 반찬이었던 적은 드물었지. 주로 그 자리에서 술안주가 됐으니까.(웃음)

우리는 모임에서 주로 가무를 담당했잖아. 각자의 장기를 하나씩 꺼내 보이면서 ‘내가 이 구역의 주인공이다.’ 하는 느낌이 들었어. 사실 아무도 신경 안 썼겠지만.
나는 그저 오빠랑 내가 콤비가 되어서 친구들을 웃기는 게 즐거웠어. 그리고 알잖아, 살다 보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 돌이켜보면 대학교 1학년 때 주인공의 기분을 느껴본 것 같아. 입학하고 새로운 사람들은 한꺼번에 많이 알게 됐는데 대부분 좋은 사람이었어. 하루하루 ‘오늘은 뭐 하고 놀지?’ 유년 시절의 즐거운 숙제를 하던 느낌이었어.

스무 살은 세상을 다 흡수할 수 있는 나이잖아. 네 전공이 뭐였더라?
한국음악과에서 타악을 전공하고 있어. 초등학생 때 가야금이 있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호기심으로 한 번 만져봤는데 손가락에 줄이 감기던 느낌이 아직도 기억나. 그 친구를 따라 국악 학원에 다닌 후로 가야금 전공으로 국립국악학교에 진학했어. 3학년 무렵 우연히 교내 연주에서 황병기 선생님의 <침향무>라는 가야금 창작곡의 장구를 맡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타악기에 빠져 전공을 바꾸고 국악고를 거쳐 대학까지 오게 됐어.

중학교 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영리하게 성취하는 사례는 흔치 않잖아.
난 관심사가 다양하고 욕심이 많거든. 이게 장점이자 단점인데 재주가 얕고 넓어. 한 친구가 농담으로 “넌 잔재주에 깔려 죽을 거야.”라고 했는데 이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해. 흥미도 빨리 느끼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도 확 느껴. 무언가 원하는 일이 있을 때는 순식간에 무섭게 빠져드니까 성과를 잘 낼 수 있는 것 같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끝을 보는 편이야.

보통은 꾸준함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즉흥적인 센스도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해. 예전에 내가 쓴 글을 가사로 즉석에서 작곡해서 놀란 기억이 나.
그날의 모든 게 완벽했어. 나는 좋은 글 읽는 걸 즐기는데 오빠의 글이 편하고 좋아. 그 글의 내용이 무척 귀여워서 가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불렀어.

민영이가 살면서 도전해본 일 리스트를 작성해도 재밌을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한번 말해볼게. 음악으로는 피아노, 플루트, 합창을 했어. 베이스 기타도 치고, 우쿨렐레도 좋아해. 아, 미디도 배웠다. 체육으로는 댄스스포츠, 수영, 육상, 축구, 투포환을 해봤고, 태권도는 오래 했어. 웨이트트레이닝은 지금도 하고 있고. 그리고 한국무용, 발레도 했어.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 요즘은 교양 수업 덕분에 소금을 불고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단소랑 비슷한데 옆으로 불어. 후후후. 잠깐만, 웃겨서 못 불겠어.(웃음) 다시, ‘딴딴 따라라 딴~’ 어때, 지하철 환승역 같아?

이 정도면 거의 종합 예체능인이네. 어디선가 들은 타고난 한량 얘기가 떠올라. 평생 취업 준비를 하면서 배우자가 용돈을 주면 악기를 장만해서 연주하던 사람이었어.
한량 좋지.(웃음) 주변 친구들이 한창 취업하는 시기야. 예체능이 아닌 다른 전공으로 졸업한 친구들이 먼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럽고 불안한
느낌이 들더라고. 특히 난 해외 취업도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이 더욱 크게 다가왔어. 앞으로 일어날 변화에 아무런 확신이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이 시기가 잘 지나가기만을 바라면서 내실을 다져야지.

2020년 코로나 시대에 졸업을 앞둔 기분이 어때?
다행히 졸업 연주는 지난해에 마쳤어. 지금이 마지막 학기인데 수업도 다 집에서 듣고 있어. 대학이 사회생활 직전의 마지막 보호막이잖아. 그게 사라진다니 조금은 두렵고, 진로 상담을 위해 교수님을 직접 뵐 수 없어서 아쉽긴 해. 또 비대면 연주는 좀 어색하더라고. 합주 수업에서도 각자 독주를 녹음해서 보내는 게 과제야.

음악을 하면서 짜릿했던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해.
지난해 체코로 인턴십을 다녀왔어. 올로모우츠의 세종학당에서 4개월쯤을 한국음악 강사로 활동했어. 나를 통해서 외국인 친구들이 우리 악기를 접하고 무대 위에서 즐기며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짜릿했어.


·사진 정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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