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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6 커버스토리

사랑이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순간에

2020.10.05 | 웹툰 <유미의 세포들>이 내 삶에 들어올 때

“매일같이 곧장 집에 와서 만화책이나 보고 혼자 술이나 홀짝거리고, 심지어 잃어버린 두근거림이라니. 청춘 시절은 이미 건어물이 되어버린 노인네 같다 이 말이야.”
— 히우라 사토루, <호타루의 빛>

2004년 고단샤의 만화잡지 <KISS>에 연재된 <호타루의 빛>은 연애를 포기한 20~30대 여성이 주인공인 만화로, 일본과 한국의 여러 창작물에 영향을 끼쳤다. 20대 직장인 ‘호타루’가 상사의 조언으로 사랑과 이별을 겪고 성장하는 이 이야기가 연재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연애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독자들에게 새롭게 읽힌다. 그리고 2015년, 이동건 작가의 <유미의 세포들>이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된다.

“일을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즐기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근사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서른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 ‘김유미’. 매달 월세 48만 원, 통신비 8만 5천 원, 인터넷 사용료 2만 원, 교통비 20만 원, 관리비 8만 원. 살 거 다 사고, 먹을 것 다 먹느라 돈은 모이지 않고, 다이어트도 뜻대로 되지 않는 데다 20대 내내 연애하던 이기적인 구남친에게 3년 전 실연당한 이후 ‘사랑 세포’가 혼수상태에 빠져 마음이 가는 직장 동료 앞에서도 무뚝뚝하고 철벽 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직장 후배인 ‘우기’를 좋아하면서도 말을 못 하던 중 우연이 겹쳐 그와 꽃 축제에 다녀온 이후 ‘두근두근 에너지’가 차오르고, 유미의 프라임 세포인 사랑 세포가 깨어난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기쁨, 슬픔, 소심, 까칠, 버럭의 다섯 감정이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일한다. 미즈시로 세토나의 <뇌내 포이즌 베리>에서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성, 부정, 긍정, 충동, 기억이 회의에 돌입하고 주인공의 연애를 위해 합심한다. 사람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존재들이 서로 대립하거나 협력하며 인물의 행동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자체는 아주 특이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유미의 세포들> 속 뇌세포들은 조금 더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유미의 세포들은 저마다 독특한 성격과 설정으로 이야기에 양념을 더해준다. 하지만 유미의 연애담을 적극적으로 이끌고 방해하는 건 사랑 세포와 응큼 세포, 출출 세포다. 특히 응큼이와 출출이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부분을 지적한다. 이들은 성욕과 식욕이라는 단순 무식해 보이는 욕구를 시도 때도 없이 주장하며 이기적으로 자신의 행복에 몰두한다. 즉물적이고 저급해 보이지만 이들은 육체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 요가 등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보여주는 차크라와 연결해 생각해보면, 이들은 척추 하단에 위치한 근원 차크라, 물라다라와 연결된다. 가장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이지만, 자아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자 생명력의 근원이다. 이 에너지에서 시작해 가장 중요한 프라임 세포로 자리 잡은 사랑 세포는 ‘두근두근 에너지’가 차오르자 깨어나 유미의 여정을 함께한다.

사실 사랑이란 유미에게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른 인물들의 머릿속에서도 사랑 세포는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사랑 세포들이 그려내는 사랑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직장 후배인 ‘루비’는 실연을 겪으며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 세포와 거짓말 세포가 융합했다. ‘새이’의 사랑 세포는 사람이 아닌 일을 사랑하지만, 새이의 프라임 세포인 감성 세포는 유미와 연애를 시작하는 ‘웅이’에게 자꾸만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를 갈구한다. 웅이의 사랑 세포는 취미 세포와 결합해 있다가 유미를 만나면서 둘이 분리되었고, 내향적인 ‘신순록’의 사랑 세포는 일상 곳곳에서 통찰력을 발휘한다. 연인과의 사랑뿐 아니라 일에 대한 사랑, 취미에 대한 사랑, 삶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유미는 사랑과 질투를 통해 배우고 깨달아간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이해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 긍정으로 이어지고, 유미는 본심을 드러낼 자신감을 되찾고 솔직해진다. 싫은 건 싫다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말하는 원칙을 되찾는 것은, 유미가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기 위한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자기 긍정은 시작일 뿐이다. 유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큰 변수가 있다. 마음속 우울 처리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우울에 사랑을 아무리 섞어도 해결이 되지 않을 때, 그 근원에는 거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 두려움은 유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므로, 유미의 세포들이 아닌 유미 자신이 맞서야 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유미는 이 두려움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유미를 사랑에 끌려다니게 만들었다.

“사랑은 일할 때도 써야 하고 취미 생활 할 때도 써야 하는데 사랑을 다 떼먹히고 빈털터리가 돼버리니까 사는 게 이 모양 이 꼴이지!”

20대 내내, 유미의 사랑은 일방적으로 퍼 주는 사랑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구남친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30대가 되어 유미의 연애는 조금 더 성숙했지만, 연애할 때 유미의 1순위는 여전히 자신이 아니라 연인이다. 연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를 붙잡기 위해 달려갈 용기나 연적과 싸울 용기는 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여전히 2순위에 머무르는 이상 유미는 연인을 이길 수는 없다. 동등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별을 결심할 용기 역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죽이며 상대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순간에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유미의 진정한 성장은 다시 사랑을 시작할 용기를 갖고 솔직해졌을 때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깨달았을 때 이루어진다.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

동글동글한 그림체 때문에 독자들이 종종 잊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며 밝혔듯이 유미는 서른두 살이다. 흔히 서른이 넘으면 성인으로서 완전히 성숙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고, 30대의 연애는 종종 결혼으로 이어질 것 같아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일과 공부에 쫓기고 생존하기 위해 아등바등 20대를 보내고 맞은 30대 초입에 연애는 여전히 쉽지 않다.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을 하는 것도, 또 이별을 하는 것도, 남들은 다 쉽게 하는 일 같은데 여전히 낯설고 어렵다. 1년 좀 넘게 연애하면 서로 익숙해지지만, 그만큼 전처럼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이든, 이별을 앞둔 연인이든, 사랑 앞에서는 다들 유치하고 지질해지는데, 이런 자신이 또 싫어져서 견딜 수 없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연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처음에는 에너지가 부족해 허덕거리며 정체되어 있던 유미의 인생은 두근두근 에너지를 변화의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안정을 원하면서 가장 단순한 욕구로 표현되던 유미의 생활은 사랑을 통해 자존감을 쌓아가고 자신을 사랑하며 이미 예전에 말라 죽은 줄 알았던 세포들을 되찾게 된다. 회사에서는 익숙한 일에서 벗어나 마케팅 부서로 옮기며 새로운 커리어에 도전하고,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는 등 유미는 사랑의 달고 쓴 맛을 딛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유미가 20대의 첫사랑 이후 여러 연애를 거쳐 성장하고 인생의 반려를 만나는 과정인 동시에 영혼의 여행이다. 이 변화의 동력에 30대 중반의 노련미가 더해지며 유미는 일과 사랑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론 사람이 사랑만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동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남들이 연애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 대열에 동참해야 하는 것도,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장하지 않거나 패배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연애는 유구한 관심사다. 이를 에너지 삼아 수많은 실수와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싹을 틔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용감하고 아름답다. <유미의 세포들>을 지켜본 지난 5년 반은 무뚝뚝하고 솔직하지 못했던 한 여성이 처음부터 사랑을 다시 배워가며 한심하고 어리숙했던 자신을 긍정하고,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며 인생의 꽃을 하나둘 피워가는, 그 빛나는 시기를 지켜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혜진
사진 최항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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