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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7 에세이

평소보다 느리고 보통 날보다 심심하게

2022.01.19 | 강원도 횡성

《빅이슈》 매거진에 글을 연재하면서부터 가끔 내 필명을 검색하거나 《빅이슈》 리뷰를 살뜰히 찾아본다. 지난 12월부터 ‘빅터 4기’(빅이슈코리아 서포터즈)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확실히 매거진에 대한 리뷰들이 많아졌는데, 그러다 가끔 나의 이 초라한 글에 대해 공감 또는 질책하는 글을 발견할 때면 그게 어떤 내용이든 반가워서 괜히 몇 번이나 곱씹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빅이슈》 콘텐츠들이 게재된 포털 게시판에 들어갔다가 내가 썼던 부산 여행기 아래 ‘가보면 머음따(뭐 없다)’라는 덧글이 남겨져 있어서 킥 웃었는데, 얼마 뒤 누군가 그 덧글 밑에 ‘머 있다(뭐 있다)’ 하고 반박 답글을 달아놓은 걸 보고 또 킥킥 웃었다.
‘가보면 별거 없어’ 같은 싱거운 소회를 나 역시 자주 쓴다. 예전에는 혼자 잔뜩 기대했다가 멋대로 실망했을 때 ‘비추천’의 태도로 뱉던 말이었지만, 요즘 내가 느끼고 전하고픈 의도는 전과 다르다.
어디든 유별난 무언가가 있는 곳엔 사람이 많고 사람이 몰려들면 또 잽싸게 별의별 게 다 생기는 세상, 현관만 나서도 온통 별천지인 도시에서 줄곧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뭐 없다, 별거 없다’ 같은 감상이 낙심이 아닌 안심에 가까워진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짜릿한 즐거움보다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는 포근함에 의지하는 날이 늘어간다. 이처럼 매섭고 소슬한 계절이면 더 그렇다.
2021년의 마지막 여행지는 횡성이었다. ‘횡성’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하게 기대되는 게 ‘횡성 한우’ 하나뿐이어서, 그냥 그대로 저녁 식사 메뉴 하나만 정하고 집을 나섰다. 덕분에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얄팍한 선입견 없는 양순한 여행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신심(信心)으로 세운 강원도 최초의 성당
풍수원 성당
강원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종교는 없지만 종교 건축물은 종종 찾는다. 어느 하나 반겨주는 이가 없어도 괜히 환영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왠지 가끔은 꾸지람 듣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감출 수 없이 어색해도 짐짓 숙연한 마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대뜸 뭘 바라며 두 손을 모으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아무튼 ‘생계’나 ‘승진’ 때문이 아닌 경건한 ‘신심’으로 지어진 종교 건축물을 기웃거리는 시간을 나는 퍽 좋아하고, 이러한 비일상은 스스로도 잴 수 없는 어떤 규칙적인 텀을 두고 어김없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앞서 ‘앞으로도 종교를 갖게 될 일은 없겠지만’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사람 일이란 건 결코 단언할 수 없으니까.
풍수원 성당은 우리나라에 지어진 네 번째 성당이자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유적지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다다른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 40여 명이 이곳 횡성 산골짜기로 숨어 와 신앙촌을 이루었고 신부도 본당도 없이 무려 80여 년간 그 믿음을, 생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후 1888년 프랑스에서 온 르메르 신부의 조력으로 본당이 마련되어 정식 성당으로 모습을 갖추었고, 1896년 2대 신부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와 신자들이 함께 손수 벽돌을 굽고 나무를 베어 평생 제 눈으로 본 적도 없었을 고딕 양식의 벽돌조 건축물, 현재의 ‘풍수원 성당’을 완성했다.
이처럼 신과 인간 사이를 기어코 잇는 갸륵한 사연을 알고 나니 풍수원 성당이 더 이상 예쁘게 잘 지은 ‘건축물’로 보이지 않았다. 청태산 기슭에 뿌리내린 한 그루 나무처럼, 거센 물살에도 휩쓸리지 않는 섬강의 바위처럼, 그저 경이로운 자연물 그 자체로 느껴졌다.
성당은 코로나19 방역 지침 때문에 미사 시간에만 개방하고 있어 들어가보지 못하고 성당 뒤 ‘옛 사제관’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옹기와 벽돌을 구웠던 가마터와 당시 신자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묵주, 성수반(성수를 담는 그릇) 등이 전시된 유물 전시관을 돌아보았다.
겨울의 해는 짧고 성당을 품은 산은 깊어 금세 어둑해질 것 같았는데, 어스름한 빛이 더디게 흩어져서 해가 넘어간 후에도 가만가만 걸음을 늦추었다. 성당을 떠나기 전 본관 뒤편 성모당에 초 하나를 켜두었는데, 그 작고 어스름한 불빛이 이따금 깜박깜박 떠오른다.

마음이 순순해지는 겨울의 맛
안흥찐빵마을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언제나처럼 ‘계획’이랄 게 애초에 없는 여행이었지만, 이 귀여운 마을을 방문한 건 정말이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 한 군데만 더 둘러볼까 하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안흥’이 횡성군에 속한 면 소재지라는 걸 알고 잠시 뇌가 정지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먹어보거나 먹는 걸 보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에 속하는, 그저 유명하다는 말로 부족한 K-간식류 대명사 ‘안흥찐빵’. 아니, 그 안흥찐빵의 ‘안흥’이 횡성이었다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익살맞은 찐빵 캐릭터들이 이곳이 바로 찐빵의 본고장임을 알리고 있었다. 마을 내 영업 중인 찐빵 가게만 18곳,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300여 명의 할머니들이 하루 2만 개가 넘는 찐빵을 빚는다고 하더니, 정말로 한 집 건너 한 집으로 찐빵 익히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정 ‘닉값’ 하는 마을이었다.
안흥면사무소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찐빵 가게 앞에도 찐빵 가게가 있고 찐빵 가게 옆에도 찐빵 가게가 있는 특이점만 빼면 아주 전형적인, 정말 ‘뭐 없는’ 시골 마을이라 찐빵에 웬만큼 진심이 아닌 이상 굳이 찾아오는 이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처럼 한겨울 북풍을 뚫고 횡성에 왔고, 이왕 지나는 길이라면 들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찜통 속 올망졸망 익어가는 찐빵들을 보는 것만으로 꽁꽁 언 몸과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안흥찐빵은 반죽을 만들 때 주로 막걸리 효모를 사용한다는데, 그 특유의 ‘골콤한’ 냄새가 묘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밥 먹은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포장만 하려고 했는데,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찐빵 가게 옆 벤치에 앉아 찐빵만 한 꼬맹이들과 함께 찐빵을 먹었다. 달지 않고 포슬포슬 부드러운 팥소, 갓 쪄내 따끈따끈한 찐빵의 맛은, 세상이 어찌 굴러가든 상관없다는 듯 태평하고 정겨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동그라미가 많이 놓인 하루가 도대체 얼마 만인지.
2022년 새해에 수령한 나이 한 살도 이렇게 반갑게 먹고 소화시키고 싶다. 그래서 이대로 작고 동그란 찐빵 하나에 하루 치 행복을 퉁치는 사람으로 좀 더 머물고 싶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7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박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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