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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2 에세이

바다의 라면은 깊고 달았다

2021.11.28 | 미식탐정

완연한 가을, 하늘은 높고 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갑자기 기록적인 한파가 시작됐다. 급격한 기온 차이에 자주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추운 날에 가장 생각나는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라면이다. 나는 종종 먹을 것을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라면은 지구 최고의 음식’이라고 한다. 숱한 산해진미를 먹어도 결국에는, 마무리로 나오는 라면은 이기기 힘들다는 단순한 논리를 말하지 않아도 라면은 너무 맛있다. 특히 한국 라면은 세계 최고의 맛을 자랑하고, 한국은 1인당 라면 소비 1위의 국가다. K-푸드 열풍의 중심에도 항상 라면이 있었고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누구나 라면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풀어야 할 이야기가 한 보따리인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가장 힘든 시절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에서 대한민국 남성들은 인생 라면을 대부분 군 복무 시절에 경험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공군 장교로 임관을 하고 배치받은 첫 근무지는 강원도 춘천이었다. 해발 900m의 험준한 산에서 시작한 신임 소위 시절은 험난했다. 첫 배치를 받고 적응하기도 힘들었지만 계속되는 선배들의 압박과 높은 업무 강도로 하루가 다르게 심신이 피폐해졌다. 숙소로 돌아온 나를 유일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건 라면이었다.

동기와 함께 2인실 숙소에 들어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히 봉지라면을 고르기 시작했다. 컵라면도 좋지만 근무를 마치고 먹는건 ‘뽀글이’만 한 것이 없다. 조리도 쉽고 버리기도 간편하다.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담아 젓가락으로 봉지를 단단히 여미고 5분 동안 기다린다. 이때 기호에 따라 소시지를 넣으면 부대찌개 라면이 되고 치즈를 넣으면 치즈라면이 된다. 종류가 다른 두 라면을 섞어도 좋다.

아직 훈련생의 티를 벗지 못한 초급 장교 두 사람은 말없이 라면을 음미했다. 짧은 머리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실내에서 먹어도 좋지만 우리는 굳이 눈이 덮인 설원을 보며 먹는 것을 선호했다. 의자에 앉아 봉지에 코를 박고 먹다 보면 한기가 있는 몸에는 열이 나고 하루의 노고가 씻겼다. 그때의 그 맛은 자연이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라면에는 기억이 담긴다. 구불구불한 면발은 빈 캔버스처럼 당시의 공기를 채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라면은 충분한 기능을 발휘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라면은 해장에 있어서 완전식품이다. 과음을 해서 물도 먹히지 않는 상황에도 국물은 술술 먹힌다. 업무적으로 출장이 잦은 10월이었다. 전국 곳곳을 다니며 로케이션을 보고다니는 2주의 시간 동안 저녁이면 동료들과 삼삼오오 술을 마시는 날도 있었는데, 아침 해장은 단연 라면이었다.

그날도 꽤나 과음을 한 상황이라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신안군 암태도에 있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우리는 마지막 로케이션 헌팅 장소로 가고 있었다. 열 시간의 이동은 모두를 지치게 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멀리서 보이는 간이 매점이었다. 매점의 현수막에는 라면을 직접 끓여준다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모두 고민을 하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 아주머니는 라면이 여러 개라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향하셨다. 간이 천막 사이로 시원한 해풍이 들어오고 있어 최고의 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을 직감했다. 라면은 언제나 주변 풍경을 반영한다.

우리는 김밥과 만두를 먹으며 조금 있으면 펼쳐질 감칠맛의 향연을 기다렸다. 다른 메뉴들도 충분히 좋았지만, 특히 2년을 숙성했다는 묵은지는 더욱 라면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주인 아주머니는 큰 ‘오봉’에 ‘스텐’ 그릇 다섯 개를 내오셨다. 고춧가루를 넉넉히 넣고 달걀을 얇게 풀어낸 라면이었다. 분식집 라면과는 묘하게 다른 비주얼이었다. 유난히 빨간 빛을 띠고 있는 국물을 한 모금 먹었다. 바닷가의 공기를 머금은 국물은 위장을 따뜻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설원에서 먹었던 그것이 생각났다. 섬의 한기로 움츠러든 위장들이 라면 국물을 만나 비로소 제 기능을 하는 느낌이었다. 뒷맛은 달착지근하게 입술에 감겼다. 면발은 지나치게 익히지 않아서 기분 좋을 정도로 고들고들했다. 식감과 맛이 심심할 겨를이 없는데 묵은지와 함께 먹으니 육수의 바디감은 더욱 견고해졌다. 김밥은 강렬한 라면 대비 간이 심심했는데 그것도 연출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남은 국물에 김밥을 적셔 먹으며 우리는 비워가는 그릇의 아쉬움을 달랬다.

어느 순간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언제의 끼니가 그렇고 어떤 맛이 그렇다. 다가오는 것들은 혀에 각인되고 기억에 쌓인다. 그리고 특별한 계기를 통해 한번에 밀려온다. 그렇게 그날의 라면은 해풍을 맞으며 내게 다가왔다.

암태남강선착장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중부로 1502-79
영업시간: 매일 아침 ~ 늦은 오후


글·사진 미식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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