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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9 에세이

인생은 아이돌이다

2020.11.27 | 인생에는 아이돌이 필요하다

*현재 2인 체제 동방신기는 활발하게 활동 중이나 이 글에는 필자가 덕질을 하던 시절의 5인 체제 동방신기를 동방신기로 지칭했습니다.

아이돌은 월급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첫 월급을 받던 날 나는 두 번 절망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가 너무 작아서, 그리고 동방신기가 없어서. 스무 살 무렵 내 꿈은 얼른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동방신기의 일본 콘서트에 가는 것이었다. 공연 환경이 상대적으로 우수했던 일본 콘서트에서 ‘아카펠라 댄스 그룹’ 동방신기의 진가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방신기는 격렬한 안무를 보여주면서 흔들림 없이 라이브로 노래하는 유일한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내 월급날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후 사회인이 되고 월급날이 돌아올 때마다 생각했다. 이제 내가 번 돈으로 일본 콘서트에 갈 수 있는데 동방신기가 없다고.

이제 내게 동방신기는 두고두고 안부가 궁금한 동창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떤 동창은 스마트폰으로 3분 만에 대출이 가능한 시대에 100만 원밖에 없다며 성폭력 피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주지 않고 있고, 또 어떤 동창은 열정의 화신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있다. 인생은 참 이상하고 오묘하다.

지금 나는 방탄소년단의 팬이다. 아이돌은 월급날을 기다려주지 않기에 때때로 신용카드를 써야 한다는 걸 아는 30대가 되었다. 그러나 동방신기가 전성기에 깨질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듯, 인생은 맘처럼 되는 게 아니다. 이제 내겐 방탄소년단도 있고 신용카드도 있지만 콘서트가 없다. ‘신천지발 코로나19 사태’로 방탄소년단의 2020년 투어가 취소되었을 때, 나는 “이×× 목 따러 갑시다!”를 가장 진심으로 말하는 상위 0.1% 인구에 속했다. 그때 나는 1997년 H.O.T.에 입덕한 이래 23년 아이돌 덕질 인생에서 가장 좋은 좌석에 당첨됐었다.(요즘은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선 빠른 티켓팅 능력 만큼이나 당첨운이 중요하다. 암표를 방지하고 유료 팬클럽 혜택을 더하기 위해 좋은 자리는 먼저 팬클럽에게 당첨으로 배정하기 때문이다) 그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내게 돌아온 좌석은 무려 본무대와 돌출 무대 사이의 그라운드석이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올해 방탄소년단의 오프라인 콘서트는 취소됐다. 늘 스타디움 공연장 3층에서 면봉만 하게 보이던 방탄소년단을 죽부인 크기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앞 은성문방구에서 50원짜리 종이 뽑기에 초콜릿 한 봉지가 당첨된 거 말고 평생 어떤 것도 당첨된 적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해당 종교의 신도 분들도 저를 좀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참고로 나는 종교가 없다.


덕질은 끝나도 인연은 계속된다
*추억 여행 주의*
누군가 말했다. ‘덕질은 나만 놓으면 끝나는 관계’라고. 1997년 H.O.T.부터 신화, 쟈니스 주니어, X-JAPAN, 동방신기를 거쳐 방탄소년단에 이르기까지, 나는 참 많은 아이돌의 손을 놓았는데 덕질이 끝난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탈덕’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중학교 2학년 때 H.O.T.에서 탈덕 했을 때 내 책상에 누가 ‘배신자’라고 써놨던 일이 기억난다. 이념적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우리 학교의 토니 부인 300여 명 중 제일 목소리가 큰 애였다. 그때는 정말 자라서 토니와 결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 사이의 유일한 장애물은 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밖에 없는 줄 알았지만, 오빠는 30대 중반에 자기보다 열여섯 살 어린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 지금 내 이상형은 그때와 같이 나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방탄소년단의 RM이다. 사실 오늘 RM이랑 손잡는 꿈을 꿨다. “나 몇 살인 줄 알아요?” 하고 묻는 순간 꿈에서 쫓겨났다. 그런 걸 왜 물어봤을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 나는 RM과 나 사이에 유일한 교집합은 RM도 나도 사람이라는 사실 말고는 없는 걸 인지하는 멀쩡한 30대 중반이 되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이던 내게 H.O.T. 탈덕은 불가항력적 일이었다. 바야흐로 2000년이었다. PC 통신에서 초고속 인터넷으로 통신수단이 가파르게 교체되며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시대와 세대가 탄생했고, 故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매운 새우깡이 출시됐고, 소찬휘의 ‘Tears’가 발표된 해였다. 여기에 역사 하나를 더하고 싶다. 신화가 ‘Only One’이라는 노래로 컴백했다. 아이돌 역사상 최초로 남자 그룹이 섹시미를 대놓고 어필한 대전환의 사건이었다. ‘그댈 차지하고 싶어’라고 노래하며 상의를 젖히는 안무를 하는 오빠들을 이차성징기의 열다섯 살 소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우리 학교의 신혜성 부인 300여 명 중 가장 목소리 큰 애가 되었다. 탈덕 했지만 그다음 해 SM 사옥 앞에서 열린 H.O.T. 해체 반대시위에 갔다. “네가 왜 거길 가?”

그냥 가고 싶었다. 얼굴로 욕하는 반 애들을 뒤로하고 달걀 물을 뒤집어쓴 건물 앞에 앉아 흰색 풍선을 흔들며 ‘우리들의 맹세’를 불렀다. 그리고 2018년 10월에 열린 H.O.T. 콘서트에서 ‘우리들의 맹세’를 다시 불렀다. 17년 만인데 가사가 방언처럼 터졌다.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한글로 받아 적어 외운 영어 랩도 정체불명인 채로 튀어나왔다. ‘썸바리 쇼스테퍼 과리사라 데리사라’ 이건 어쨌든 영어다. ‘전사의 후예’ 가사다. ‘섬바디 슈드 스탠드 포 왓 이스 라이트 댓 이스 라이트 댓’으로 외워야 했던.

거대한 잠실 주경기장에 ‘아이야’의 거대한 현악기 전주가 울려 퍼지며 콘서트가 시작되었을 때 나를 포함해 주변의 30~40대 관객 모두가 펑펑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단언컨대 방탄소년단 콘서트 때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반, ‘살아보니 별것도 없던데 왜?!’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난 내 세상은 내가 스스로 만들 거야. 똑같은 삶을 강요하지 마.’ ‘난 그게 싫어. 하나도 보고 배울 것이 없는 그대들 재미없어.’ ‘We Are The Future’와 ‘열맞춰’를 부르며 더는 어른과 기성을 탓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리고 이 찬란한 콘서트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 눈떴을 때 H.O.T. 멤버들이 느낄 회한을 상상하며 인생이 덧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 같던 콘서트가 정말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생애 다신 없을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앙코르를 외쳤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하나가 막을 내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어른이 되었다.

2017년 9월, 2인 체제 동방신기가 제대하고 연 팬 미팅에도 갔다. “네가 왜 거길 가?” 그냥 가고 싶었다. 인생의 큰 산을 넘고 새로운 출발점 앞에 선 그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장인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야말로 완벽한 공연이 끝나고 동방신기가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사람과 사람이 오랜 세월을 함께 쌓아야만 가능한 묵직한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덕질은 끝나도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인스타그램에 이런 일기를 썼다. ‘깊고 넓은 우정을 담아 여기에 왔다. 윤호야, 창민아, 고맙다. 우리 이렇게 어른이 됐네. ‘O-正.反.合’ 가사가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데뷔 이래 늘 전성기였지만 여전히 전성기인 동방신기를 볼 때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잘 키운 손자를 장가보내는 할머니의 미소 같은 걸 짓게 된다. 한때 내 금지 영상이었던 ‘인생의 진리지’ 랩을 하는 유노윤호를 볼 때 유난히 광대뼈가 많이 발사된다. 흑역사를 흑역사가 아니게 하는 당당함은 그가 헤쳐온 자랑스러운 세월에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인의 동방신기를 응원하는 마음은 ‘O-正.反.合’을 이해할 때까지 지속될 것 같다. 참고로 가사는 이렇다. ‘난 가야 돼. 가야 돼. 나의 반이 정 바로 정 바로 잡을 때까지. 정반합의 노력이 언젠가 이 땅에 꿈을 피워낼 거야.’

인생에는 아이돌이 필요하다
내 덕질 연대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애잔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집에 초대되면 식사하는 동안 함께 들을 신청곡 다섯 곡을 알려줘야 하는데 ‘범죄자 노래 금지’ 규칙이 있다고 하면 수능 다음 날 고3 교실 같은 침울한 기운이 흐른다. 누구에게나 금지곡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 내겐 방탄소년단이 있고, 난 인생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바야흐로 2020년이다. 코로나19로 인생이 가장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해.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사태’의 그 클럽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살고, 실직자이며, 1인 가정의 가장인 나는 가족에게도 코로나19의 현현 같은 존재가 되어 두어 달 동안 사람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지 못했다. 방탄소년단이 없었으면 사람의 온기를 느끼지 못해 얼어 죽었을 거다.

방탄소년단은 왜 인기가 많을까? 이에 대해선 다음 연재에 자세히 쓰겠다. 추억 여행을 오래 해서 지면이 모자라다. 한 가지만 미리 말하자면, 방탄소년단이 아주 건강한 웃음을 짓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고 활기차다. 이것이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간 많은 K-POP 아이돌이 미국 시장에 도전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는 대형 기획사에서 올림픽에 출전하듯 영어 가사로 된 곡을 발표해왔다. 잘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듣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에 반해 방탄소년단은 시스템이랄 게 없는 작은 기획사에서 데뷔했다. 가진 건 꿈밖에 없고 믿을 건 서로밖에 없는 환경에서 출발했다. 서툴더라도 멤버 본인의 내밀한 심리를 가사로 쓴 힙합 장르를 기반으로 음악 활동을 하며, 방탄소년단 개개인이 지금 생각하는 것이 곧 방탄소년단의 현재인 서사를 구축했다. 여기에 노력과 우연이 더해져 방탄소년단은 시스템의 매력이 아닌 사람의 매력을 세일즈 하는 특별한 아이돌로 성장했다. 시스템에는 표정이 없다. 오로지 사람만이 미소 지을 수 있다.

미국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문화도 낯설고 영어도 잘 못해서, 중학생 때 우리 학교에서 가장 목소리 큰 애였던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제일 목소리 작은 애가 되었다. ‘샤이 트럼프(Shy Trump)’보다 더 샤이 했다. 그 때문인지 2017년 방탄소년단이 처음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입성했을 때 상을 받은 사실보다 시상 무대로 올라가는 자연스러운 표정과 걸음에서 더 많은 감동을 느꼈다. 세계적인 음악 시상식에 ‘최초’라는 타이틀을 100개쯤 달고 참석해도, 영어를 잘 못해도 방탄소년단은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긍지를 가진 인간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

내 인생에 아이돌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방탄소년단이 나에게 왔다. 유튜브 자동 재생을 타고 왔다. 여전히 비자발적 자가격리자이자 실직자이며 1인 가정의 가장인 나는 오늘도 모니터 속 방탄소년단에게서 사람의 온기를 쬔다. 인생에는 아이돌이 필요하다. 가장 절망적일 때에도 그들은 우리를 웃게 한다. 유구한 아이돌 덕질의 연재를 시작하며, 다음 회에는 본격적으로 방탄소년단의 전 지구적 매력을 자랑하는 글을 쓰도록 하겠다.


사진 최이삭
인생을 아이돌로 배운 사람. 인스타그램 @isak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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