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상단으로이동
신간 · 과월호 홈 / 매거진 / 신간 · 과월호
링크복사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
글자확대
글자축소

No.322 에세이

서울 동네 - 어느 맥시멀리스트의 안식처 │ 글벗서점

2024.07.18

친구가 북 스캐너와 작두형 책 절단기를 선물했다. 이제 그만, 저 산처럼 쌓인 책들을 ‘디지털화’하라는 조언과 함께.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

이것저것 사들이는 맥시멀리스트의 삶을 살고 있는 나지만, 특히나 책을 사는 데에는 더 거침이 없었다. 이상하게 책에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좋은 책 한 권이 쓰이는 데에 얼마나 많은 세계가 충돌하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쓰이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점이나 도서관같이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으면 퍽 든든하고 안온한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둘 사 모은 책이 어느새 몇천 권. 이사를 할 때면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벽면 가득 채운 책들을 보고 작은 탄식을 내뱉는다. ‘이크, 오늘 단단히 잘못 걸렸군.’ 싶은 눈빛을 하며.

“이참에 책 정리를 한번 싹 해봐. 꼭 소장해야 하는 것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스캔해서 파일로 저장해두는 거지. 부동산도 안 차지하고 얼마나 좋아.” 이 말과 함께 친구가 큰맘 먹고 샀다며 북 스캐너와 작두형 책 절단기를 선물했다. 그래, 언제까지 이 책을 이고 지고 다닐 수는 없다. 스캔한 후 파일로 변환해놓으면 수백, 수천 권의 책을 A4 크기만 한 태블릿 PC 안에 쏙 넣을 수 있는데 말이다. 만만치 않은 가격의 엡손 북 스캐너는 PDF OCR 기능까지 지원해 파일 변환 후 원하는 내용을 손쉽게 검색할 수도 있었다. 그래, 홀가분하고 스마트한 변화를 시작할 때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동 스캔을 받으려면 책 절단기로 책등 부분을 댕강 자르는 과정이 필요했다. 책의 파손이 불가피한 것이다. 접착제로 제본된 책의 왼쪽을 절단기에 끼우고 힘껏 작두질을 하고 있자니 마치 단두대에 책을 올려놓고 생명을 끊는 기분이 들었다.

오로지 책 안의 텍스트를 읽는 게 목적이라면 당장 부동산을 차지하고 있는 저 책들을 댕강댕강 교수형에 처한 후 낱장으로 자동 스캔 받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필이면 책의 물성 자체를 애정하는 사람이었다. 사방이 누렇게 변한 오래된 책의 늙은 표정과, 손에 잡히는 두께로 먼저 가늠하는 독서의 시간들, 만드는 이들이 고심해서 골랐을 표지와 내지의 촉감, 색감들을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책이 차지하는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러 우리 집에 들어온 북 스캐너와 절단기는 지들 몸만큼의 부동산만 더 차지하며 책장 옆에 잠들어 있다. 이후에도 차곡차곡 새로운 책들은 계속 쌓여만 갔다.

아주 오래된, 책을 들이는 습관

나와 내 동생이 한글을 깨쳤을 무렵, 부모님은 외식을 하거나 가족끼리 외출을 할 때면 맨 마지막 코스로 항상 우리를 서점에 데리고 갔다. 우리 남매에게 서점은 맛있는 것을 먹고 난 다음 들르는 기분 좋은 놀이터였다. 거기서 한참 책을 보다가 각자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씩을 사서 나오는 것. 이는 우리 가족의 오랜 루틴이자 문화였다.

서점에 가면 만화책이 즐비한 코믹스 서가로 후다닥 뛰어가는 동생과 달리 나는 <어린이 삼강오륜>, <댕기동자 가라사대>(한문 교육 동화), <어린이가 꼭 읽어야 할 세계명작 시리즈> 같은 모범생용 책들을 골라 들었다. 장녀 콤플렉스와 함께 그 와중에도 있어 보이고 싶은 지적 허영심이 발동했으리라. 집에 오자마자 동생이 고른 만화책부터 뺏어 읽었지만 그렇게 가족의 루틴으로 사들인 책들은 차곡차곡 내 책장에 성실히 쌓였다. 작고 연약한 내 세계가 올록볼록 새로운 확장을 시작한 것도 다 그 책들과 함께였다. 새로운 책을 들인다는 건 곧 기존의 세계에 즐거운 균열을 가하는 일이었다.

나갔다 하면 책을 사 들고 들어오는 지금의 내 습관은 그러니까 조기교육(?)의 결과라는 말이다. 문제는 그 소비가 날이 갈수록 과소비의 행태를 띠고 있다는 것. 굳이 과소비라고 표현하는 것은 읽지 못한 책이 쌓여가는데도 계속 책을 사들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적게는 두세 권, 많게는 수십 권을 구매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다독가냐고 물으면 그저 우물쭈물해지고 만다. ‘사놓으면 언젠가는 읽는다.’는 내 신조는 여전히 변함없지만 계속 늘어나는 책의 공간과 읽지 못하는 책이 쌓이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감은 분명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앞서 산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절대로 새 책을 구매하지 말자,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보물찾기의 마음으로 서가를 헤매다

그날은 친구와 오랜만에 홍대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조금 있어 신촌에서부터 동교동까지 슬렁슬렁 산책을 했다. “세상의 모든 책은 사람이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보이는 건물 2층에 쓰인 글귀에 발걸음이 멈췄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내심 궁금했던 곳. 매장 테두리를 빙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책 군단들을 보며 한번 시간 내서 가봐야지 했던 헌책방, 글벗서점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꽉 찬 서가, 몸을 살짝 틀어서 지나가야 하는 책장과 책장 사이의 비좁은 길들.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텁텁한 향기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지하 1층부터 1층, 2층까지 책으로 꽉꽉 들어차 있는 이곳은 기광서, 김현숙 부부가 1979년부터 이어온 생의 터전이자 서울에서 몇 개 남지 않은 오래된 헌책방이다.

처음부터 글벗서점이라는 이름을 쓴 건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 ‘온고당’이라는 이름으로 서교동에서, 1980년대에서 2005년까지는 홍대 정문 앞에서, 2006년 ‘글벗서점’으로 이름을 바꾸며 동교동삼거리에서, 그리고 2016년 현재의 자리까지 약 45년에 걸쳐 헌책방을 이어오고 있다.

온고당은 그 당시 한국의 미술·사진·예술 전문 1호 책방으로 알려지며 홍대 학생들과 교수, 작가들의 보물창고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구하기 어려운 예술 서적이나 도록, 전집을 ‘득템’하는 곳. 그래서 홍대뿐 아니라 전국의 미대생들이 이 헌책방을 찾았다고. 이곳의 책들이 누군가의 하루를, 진로를,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누군가의 태도와 마음을 이어받는

‘앞서 산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절대로 새 책을 구매하지 말자.’는 굳은 다짐은 이 광활한 보물창고에서 맥없이 허물어졌다. 30만 권이 넘는 책들 사이에서 마음이 가는 책을 만나기 위해 하나하나 눈을 맞추는 시간. 행여 보물을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좁은 통로 사이를 아주 천천히, 더듬더듬 걸어 나갔다. 사고 싶은 책만 검색해서 바로 사버리는 온라인 서점의 도서 구매 경험과는 다른 결.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특별히 목적하는 책 없이 같은 분야로 묶인 책들을 찬찬히 훑어보다 보니 신간만 모여 있는 대형 서점과는 또 다른 시간 축도 보였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을 끄는 첫 번째 책을 만났다. ‘뿌리깊은나무’에서 발간한 <한국의 발견–한반도와 한국 사람> 시리즈였다.

출판사 ‘뿌리깊은나무’는 동명의 잡지로 익히 알고 있던 곳이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창업자인 한창기가 만든 종합교양지 <뿌리깊은 나무>는 한국인의 삶,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집요하게 탐구하고 기록한 매체로 출판계에서도 의미 있게 다뤄온 잡지다. 한글 전용 잡지로 1976년 3월에 창간해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국의 발견>은 잡지 폐간 후 1983년에 발간된 시리즈로 서울·경기·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부산·제주 총 11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벗서점에는 전체 시리즈가 다 있었지만 우선 흥미가 가는 서울과 강원도, 제주도 편을 구매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커버를 벗기니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버건디 컬러의 양장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컴퓨터 조판 기술이 적용되기 전이라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인쇄 공정도 많았을 터. 몇십 년의 세월을 거쳐온 책이건만 만듦새는 지금 책보다 더 탄탄하고 짱짱해 보였다.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는데 머리말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서울 편이 인상적이었는데, 뛰어난 도판과 당대의 지식인들이 조명한 서울의 역사, 문화, 사회에 관한 기사들은 지금 읽어도 충분히 밀도가 있었다. 독자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잘 탈 수 있도록 집요하고 정성스럽게 쓰인 글들이 354페이지에 이른다. 조각조각 나 있거나 요약된 정보가 아닌 완결된 형태의 콘텐츠. 만든 이들의 집념과 자존심이 느껴졌다.

“대개 그 크기의 전집물들이 집에서 책장을 장식하거나 하기가 일쑤인 것하고는 달리 <한국의 발견>은 한국 땅, 한국 사람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사람들 손에서 손때가 많이 묻었읍니다. 차원 높은 지식과 지혜와 정보의 짐을 독자의 마음에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알기 쉽고 조리있고 논리적인 언어의 바퀴가 효과있게 전달했기 때문일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케이비에스 방송국이나 엠비시 방송국의 도서실에 가 보시면 거기에 꽂힌 책도 많건만 유독히 <한국의 발견>만이 해지고 때묻고 누가 ‘훔쳐가’ 이 빠져 있읍니다.”

서울 편 맨 뒤에 있는 발행인 한창기의 말. 서울에 관한 인문학적 접근부터 당시 서울을 이루는 열일곱 군데의 구에 관한 촘촘한 취재와 기록, 서울 토박이 필진이 말하는 서울 생활 모습까지. 이런 작업들을 80년대에 해왔다니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아는 사람은 아는 책이었지만 아마도 이곳 헌책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이 책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앞선 이들이 만들어놓은 이런 멋진 토대를 목격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경험이다. 문화적인 자산을 물려받은 느낌이 든달까. 매번 허물어 다시 쌓는 게 아니라 윗세대가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서 지금의 생각을 쌓아 올리는 것, 그것들이 차곡차곡 반복되고 누적될 때 비로소 단단한 저력이 될 것이다.

그날 이후 틈틈이 글벗서점에 가서 보물들을 길어 올리는 중이다. 서점에는 김현숙 사장님의 취향일 게 분명한 1980년대 가요가 흐르고, 각자의 사연으로 여기 모인 책들은 나른하게 누워 인연이 될 누군가를 기다린다. 손 글씨로 무심하게 쓰인 서가 분류 안내판까지 아무리 봐도 완벽하다.

조용한 집 안에 앉아 벽면 가득 들어찬 나의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본다. 먼 훗날 이 책들은 어디에서 그 생명을 이어나가게 될까. 몇 원도 안 되는 비용에 팔려 파지가 되어버릴 수도, 정성스럽게 매만져주는 누군가의 손을 거쳐 헌책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다. 새삼스레 책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활자를 빚고 책 모양새를 만든 이들의 숨도 함께 포개져 방 안을 채운다.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결국 반짝이는 것들에 관해 꾹꾹 눌러쓴다. [email protected]


1 2 3 4 5 6 

다른 매거진

No.346B

2026.04.01 발매


마녀배달부 키키

No.346A

2026.04.01 발매


전소민

No.345

2026.03.03 발매


고아성

No.344B

2026.02.02 발매


스노우

< 이전 다음 >
빅이슈의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