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가까이에 두고, 바라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화분을 곁에 두는 마음과, 식물이 살고 있는 숲 근처에서 일하는 식물세밀화가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식물학 연구부터 브랜드, 문화예술 분야까지 식물 그림이 필요한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리는 이소영 식물세밀화가의 작업실은 광릉숲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 한적한 강을 따라 산책하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움츠렸던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식물세밀화가의 시간은 식물의 호흡에 맞춰 좀 더 분주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식물세밀화가는 식물을 정직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기록하는 사람이고, 모든 생활이 식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죠. 국내외에서 모은 옛 식물 서적 및 자료가 가득한 그의 작업실에서 좋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글. 정규환 | 사진. 이규연
광릉숲 근처에 작업실을 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광릉숲 안에 국립수목원이 있는데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식물세밀화가가 되기 위해 알아보니 한국에서 유일하게 식물세밀화가를 채용하는 곳이 국립수목원인 거예요. 운이 좋게 첫 직장으로 그곳에서 식물세밀화를 그릴 수 있었고, 그만둔 후에도 계속 수목원과 일하고 있어요.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일은 아무래도 식물과 가까이 있는 게 중요하잖아요. 특히 국립수목원엔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자생식물을 볼 수 있거든요. 굳이 이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처에 작업실을 꾸리게 되었어요.
식물세밀화가로서 작업실을 만들 때, 인테리어에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보시다시피 책이 많아요. 이 중엔 100년이 넘은 오래된 책도 있는데요. 식물세밀화를 잘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잘 보존하는 것도 중요해요. 햇빛으로 인해 책이 훼손될 수 있거든요. 이 공간이 처음엔 개방된 스튜디오 형태였는데 가벽으로 공간을 분리해 햇빛이 안 드는 방을 하나 만드는 공사를 했어요. 그리고 제가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작업하는 스타일인데요. 프리랜서로 10년 동안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아, 편안하게 오래 지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식물을 관찰하면서 느낀 각 식물만의 개성이 있을 것 같아요.
식물은 한번 뿌리내린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요. 누가 보지 않아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식물과 사람은 같은 생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람은 동물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인 제가 식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식물을 만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식물과 제가 가진 공통점을 찾게 되는 순간도 있고, 또 반대로 식물과 나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동안 식물을 그리면서 애착을 느낀 종이 있나요?
제가 쓴 <식물의 책>(책읽는수요일, 2019) 첫 꼭지가 민들레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민들레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잡초의 대표적인 식물이에요. 흔한 풀꽃에도 민들레, 꽃마리, 꽃다지처럼 다 이름이 있잖아요. 식물연구자들의 역할은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에 이름을 붙이고 불러주는 거라, 사람들이 가치를 모르고 있던 식물의 소중함과 매력을 알릴 때 희열을 느껴요.
예를 들면 어떤 식물이 있을까요?
혹시 쑥의 꽃을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쑥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에게 필요한 부위만 알 때가 많아요. 쑥도 꽃이 피거든요. 예전에 쑥 디퓨저의 패키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쑥 디퓨저를 상상하면 왠지 낯설잖아요. 다른 식물들과 혼합하니 쑥의 향이 매력적이더라고요. 스스로도 쑥에 대해서 다시 본 면이 있어요. 저조차도 식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고, 식물의 편견을 없애는 것 역시 연구자들의 역할이라고 느꼈습니다.
식물과 비슷한 호흡으로 살아간다는 말의 뜻을 설명해주세요.
지난겨울에는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전 식물 생채를 건조해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표본으로 만드는 일을 했어요. 봄은 한창 꽃이 피기 시작할 때잖아요. 식물의 생애를 쫓다 보니 식물이 잎을 피울 때라든지 꽃을 피울 때, 열매를 맺을 때 저도 더불어 바빠져요. 식물의 호흡이라는 건 결국에는 자연의 호흡이거든요. 우리가 우리의 자생지인 이 땅의 혹독한 여름과 겨울에 적응하며 살듯 식물과 사람 둘 다 환경에 영향을 받아요.
식물로부터 배우는 교훈이 있다면요?
불안해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잘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식물세밀화를 그리면서 깨달은 건 식물이 추운 겨울을 견뎌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힘든 일은 결국 언젠가 지나간다는 사실이에요. 겨울이 춥지 않으면 꽃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듯, 힘들 때나 어려울 때가 있더라도 현재를 잘 참고 견뎌내야 또 다른 좋은 일이 찾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앞으로 그리고 있는 식물과 함께하는 삶이 궁금해요.
스스로의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말은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한다는 의미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좋아하는 걸 자세하게 오랫동안 보는 게 꼭 필요하다고 느껴요. 저도 식물을 만나고 볼수록 그들을 더 좋아하게 돼요. 좋아하는 식물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볼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 식물을 계속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대로 오랫동안 식물을 그리고 싶어요.
식물세밀화가의 이야기
#첫 숲, 광릉숲의 인연
이소영 식물세밀화가는 광릉숲과 인연이 많다.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후, 광릉숲에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식물세밀화가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광릉 근처가 아버지의 고향이라 어렸을 때부터 친숙한 시골처럼 느꼈고, 훗날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해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국립수목원(구 광릉수목원)에서 데이트를 했고, 어머니는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이 수목원에 당신을 데려온 아버지에게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훗날 수목원에서 일하면서 꽂 필 때의 수목원은 너무 아름답기에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납득하게 됐다고. 세계적으로도 서울 같은 대도시 인근에 이렇게 다양한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숲에 자리한 국립수목원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전지역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그릴까
식물세밀화의 스케치로는 제도용 ‘로트링 펜’을 주로 사용한다. 예전에는 만화가처럼 펜촉에 잉크를 묻혀서 그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0.03mm의 가는 로트링 펜으로 그린다. 채색할 땐 수채 물감이나 수채 색연필을 사용한다.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섬세하게 집거나 고정할 때 핀셋과 시침핀의 활용도 필수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서 실내에선 현미경을 사용하는데, 실외에선 ‘루페’라고 부르는 휴대용 확대경을 사용하곤 한다. 작은 꽃이나 잎이 렌즈 안에 들어오면 꽃가루와 털까지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식물 잘 키우는 팁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식물 키우기로 위안을 얻었다. 필연적으로 식물을 잘 키우는 방법에도 관심이 높아졌는데, 식물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물을 원하진 않는다는 사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포만감을 느끼는 게 기쁜 것처럼 관엽식물에 물을 줄 때는 조금씩 자주 주기보다 2주에 한 번, 화분 받침에 물빠짐이 보일 정도로 흠뻑 주는 게 중요하다. 특히 한국의 여름철은 공기 중에 물이 많은 고온다습한 환경이기 때문에 다육식물이나 선인장을 실내에서 잘 키우기란 쉽지 않다.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은 주로 사람 쪽이다. 식물에 지나친 관심은 금물일까. 그 적당함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