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이 그저 개인의 일탈이 되면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되니 해결책도 간편해진다. 정치인들이 내놓는 대책은 ‘이 연쇄적인 사건은 개인의 책임이니 자신들의 책임이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동시다발적 칼부림은 원인이 아닌 결과이며 한국 사회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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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더운 날이었다. 햇살이 뜨거웠기에 횡단보도에 선 보행자들이 차양막 근처로 몰려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건너가기만을 바라고 있던 와중 한 노인이 내 앞에 섰다. 그는 횡단보도 쪽을 바라보지 않고 사선으로 몸을 틀어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것 봐. 나라에서 이렇게 그늘도 설치해주고. 얼마나 좋아. 응? 이게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야? 그런데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칼을 들고 설치고 그래? 칼을 들고 무섭게 말이야?”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가 향한 시선의 끝을 따라가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즉 누군가를 향해 한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데 목소리가 커서 횡단보도 주위에 선 사람들에게 넉넉히 들릴 정도였다. 동행으로 보이는 옆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소리를 낮추라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다들 슬그머니 그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드디어 녹색불이 들어오자 그는 동행과 함께 빠른 속도로 횡단보도를 건넜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소에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구축된 필터버블 때문에 듣지 못하는 강한 어조의 힐난을 바로 앞에서 들은 탓에 당황했으나 동시에 환기가 되었다.
횡단보도 앞의 차양막은 나라가 아닌 구에서 설치한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차양막을 설치해주면 좋은 나라라는 말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에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집단적 칼부림이 영 마뜩잖던 것이다.
그 이튿날에는 내가 사는 동네 인근에서 칼을 든 남성이 나타나 몇 시간에 걸쳐 경찰과 대치하다가 체포된 일이 있었다. 나는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외출하려는 연인에게 나가지 말라고 말한 뒤 남성이 체포되기까지 집에서 기다렸다. 일상에서 생활하는 공간이 위험에 노출된다는 건 무섭고도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그 후로 며칠간은 자연스럽게 날이 어두워지면 바깥출입을 줄이게 됐다. 연인은 내게 간단한 호신술 영상과 칼에 찔렸을 때의 대처 요령을 담은 영상을 공유해주었다. 그는 불안해하다 충동적으로 호신용품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호신용품은 최근 주문 폭주로 인해 배송이 늦어진다고 했다.
이 글은 '칼부림은 원인이 아닌 결과다 (2)'에서 이어집니다.
소개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함께 만들고 동명의 책을 썼다. 사람 하나, 개 하나랑 서울에서 살고 있다. [email protected]
글. 유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