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비의도적 연애담> 피비 작가 (1)'에서 이어집니다.
섬세한 감정선과 촘촘한 스토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웹툰 <비의도적 연애담>이 2023년 봄, 드라마라는 또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찾아왔다. 거짓말로 시작된 관계지만, 서로가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주며 점점 사랑의 형태에 가까워지는 태준과 원영을 지켜보다 보면 멸종했던 연애세포가 절로 생성된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을 만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비연담’ 속 캐릭터를 빚어낸 피비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외전 한정판 박스 특전 엽서 그림
이전에도 많은 작품을 해오셨지만, <비의도적 연애담>은 작가님께 각별한 작품일 것 같습니다. 연재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비의도적 연애담>은 애초에 거짓말로 시작했던 관계이기 때문에 두 주인공들의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작품이었어요. 거짓말로 태준의 곁에 머문 원영은 시작부터 비호감을 적립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는데요. 결국엔 ‘가해자’인 원영마저도 독자들이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야 했던 부분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어요. 원영의 거짓말이 들통난 이후 태준에게 다시 대시하며 사랑을 얻어내려 애쓰는 구간은, 이야기가 완결된 지금에야 소위 ‘꿀고구마’라고 불리지만, 연재 당시에는 꽤 욕을 먹었어요. 원영을 염치없고 이기적이라며 욕하는 독자님들도 계셨고, 도대체 언제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거냐며 빨리 이 구간이 끝나면 좋겠다고 피드백 주시는 독자님들도 많았어요. 제가 사랑하는 원영이가 이렇게 독자님들께 욕을 먹는 게 꼭 저 때문인 것 같아서, 괴로운 마음에 작업하다가 운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원영일 좀 더 고생시킬걸… 하는 못된 마음이 들기도 해요. 제가 보기에도 서로 마음이 엇갈리는 그 시기가 너무 재밌거든요. 결국 태준이는 원영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요!
작가님 작품들을 보면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순정만화’의 클리셰를 극대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아하는 인물들의 관계 구도나 캐릭터 설정이 있으신가요?
처음엔 순정만화의 코드라던가, 클리셰를 재밌게 엮었다는 평가가 그렇게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어요. 명백히 이야기를 만드는 직업인데, 트렌드에 뒤처지고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싶어 자조적인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다 받아들이게 됐어요. 찬찬히 곱씹어보니 제가 애초에 그런 코드를 좋아하는 게 맞더라고요. 어렵고 불편한 전개보다는 누구나 다 알고 공감하는 쉬운 감정으로 마음을 흔드는 전개가 더 취향이었거든요.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일상적인 소재와 순간순간 나쁜 결정을 할 수는 있어도 뼛속부터 못되지는 않은 인간 군상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걸 잘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친 있어요>가 첫사랑 이야기라면, <비의도적 연애담>은 거짓말을 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요. 전작들도 그렇고 연애에 직진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캐릭터 관계를 짤 때 중시하시는 게 있나요?
자칫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구원 서사’예요. <남친 있어요>에선 결이의 결핍된 자존감을, <비의도적 연애담>에선 태준의 망가진 사랑에 대한 아픔을 각각 현호와 원영이 채워주잖아요. 반대로 현호는 한결로부터 꿈을 향한 의지를 견고히 하는 계기를, 원영은 태준으로부터 절대 흔들리지 않을 신뢰를 받기도 하죠. 결핍을 상대방이 채워줄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둘 중 한 명은 직진하는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까요. 무엇보다 감정에 솔직하고 직진하는 ‘햇살캐’가 있으면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끌어올릴 수 있고,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기도 해서 작가로서 예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원영 생일 등신대 그림
원영이나 태준이도 그렇고, 작가님 작품은 ‘현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인물, 직업, 주변 환경 등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시나요?
만화가라는 직업적 특성상 외부 환경이 다채롭진 않아요. 내향형 ‘집순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보통 직접적인 경험보단 간접적 경험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에요. 평소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데,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환경, 직업, 배경의 인물들을 주관적인 해석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에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도예가라는 태준의 직업과 청년몰이란 배경도 다큐멘터리를 보고 얻었던 아이디어였어요.
어릴 때부터 즐겨 보신 작품이나 좋아하는 만화들을 알려주세요.
전 웹툰보다는 <이슈>(Issue, 대원씨아이에서 발행하는 순정만화 잡지. 1995년 12월에 창간, 2020년 11월 15일 발행한 이슈 11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윙크>(서울미디어코믹스에서 발행하는 만화잡지. 1993년 8월에 창간.) 등 출판만화 세대에 가까워요. 제 만화가 순정만화스럽다는 평가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어릴 때부터 원수연, 이미라, 한승원 작가님들 책을 한 권씩 사 모으고, 따라 그리면서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웠거든요. BL 장르 역시 일본의 출판만화를 통해 처음 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본 작품들이 월등히 많은 편이에요. 나츠메 이사쿠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고, 최근엔 사강사강 작가님의 <올드 패션 컵케이크>, 손개피 작가님의 <봉촌각시>를 정말 재밌게 봤어요.
지난해 12월에 <비의도적 연애담> 특별 외전이 나왔고, 아직 차기작은 공개된 바 없는데요. 차기작을 구상하고 계시다면 어떤 장르이며 어떤 배경인지 살짝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장르는 여전히 BL이지만, 이번에는 컬러 웹툰을 시도해볼 생각이에요. 이제껏 흑백 출판만화의 작법만을 고수해온지라 개인적으로는 무척 큰 도전인 셈인데요. 열심히 공부해서 어설프지 않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게 최대 숙제예요. 차기작의 키워드는 아마 ‘혐오 관계 서사’가 될 듯한데, 사사건건 부딪치고 대립하느라 ‘내가 저놈을 좋아할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연애하는 걸 그려보고 싶어요. 그 단호한 결심이 꺾이는 과정을 그리는 게 재밌을 것 같아요.
웹툰이 영화, 드라마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데요. BL 웹툰을 둘러싼 업계의 인지도나 환경도 함께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한국의 BL 웹툰 시장은 짧은 기간 동안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요. 최근에는 미디어 믹스 시장이 유난히 탄력을 받고 급성장하는 중이고요. 이 성장은 재능 넘치는 수많은 작가님, 관계자분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주신 덕도 있지만, 성숙한 태도를 지닌 독자님들의 지분도 크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것에는 열광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고, 양질의 피드백을 무한 제공하는 이런 고급 독자층을 업계가 소중히 대해주면 좋겠어요.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요. 그들이 말하는 니즈를 정확히 듣고 함께 고민하다 보면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가 만족하는, 양질의 풍족한 BL 시장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글. 김송희·김윤지 | 이미지제공. 피비·대원씨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