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의 극장 상황은 살얼음판이나 진배없다. 관객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다가도 확진자가 불어나면 금방 한산해지는 모양새가 반복되는 중이다. 먼지 쌓일까 걱정되는 극장 의자에 사람의 온기가 유지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하지 싶다. 그렇게 쓸쓸했던 2021년에도 많은 영화가 스크린의 문을 두드렸다. 흥행에 성공한 몇몇 영화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쓴맛을 봐야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운디네', '자마', '퍼스트 카우' 같은 걸작은 흥행하지는 못했어도 연말의 베스트 무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겠지만, 이미 기억 너머로 사라진 영화들은 어쩌면 좋을까. 물론 올해 개봉한 모든 영화를 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 불러낸 작품들은 잔잔한 미소를 띠게 하는 유의 것들이다. 자극적인 장르영화나 대단한 예술영화는 아니어도 살아가다 한번쯤 떠올리면 기분 좋아질, 그런 영화를 모아봤다.
너무 사랑스러워!
맨 먼저 소개할 작품은 세 편의 로드무비다. 미국의 작고 예쁜 영화 '피넛 버터 팔콘', 프랑스의 감동 드라마 '파리의 별빛 아래', 벨기에산 원작 코미디가 워낙 재미있어서 네덜란드에 이어 미국에서도 리메이크한 '컴 애즈 유 아'다.

'피넛 버터 팔콘'(2019)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소년이 보호소에서 탈출해 꿈에 그리던 레슬링 학교로 출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젊은 어부와 보호소 직원이 그와 동행하면서 육지와 강을 오가는 여정은 흐뭇한 이야깃거리로 채워진다.

'컴 애즈 유 아'(2019)는 장애인이 주인공인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피넛 버터 팔콘'과 유사하지만, 세 친구의 은밀한 여행 목적은 훨씬 짓궂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각기 다른 캐릭터가 안기는 즐거움도 한몫한다.

'파리의 별빛 아래'(2020)는 제목에 걸맞게 서정적인 감동 드라마다. 난민 소년과 파리의 노숙자 여성이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흔한 신파처럼 들리겠지만 속단은 금물. 말이 통하지 않는 중년 여성과 꼬마가 역경을 헤치고 걸어가는 노정은 눈물과 미소를 안겨줄 것으로 확신한다.
애니메이션을 몇 편 추천하고 싶었는데, 대부분이 엄청난 예산을 들인 잘 알려진 대작이거나 심하게 어린이 취향의 작품이라서 제외했다. 이 중에서 어렵게 고른 한 편 '미션 임파서블: 루벤'(2018)은 우선 제목이 어처구니없어서 안타까운 경우다.

액션 스파이물로 착각할지 모를 이 애니메이션은 헝가리에서 온 낯선 아트 애니메이션이다. 가치가 빼어난 명화만 골라 훔치는 여자와 그녀의 배후, 그들을 쫓는 탐정의 이야기인데, 그들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가족의 비밀이 우선 흥미진진하다. 압권은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세계적인 명화들을 포함해, 가히 눈을 호강시키고도 넘칠 이미지의 향연이다. 영화를 본 뒤에 오랫동안 눈앞에서 아른거릴 작품. 단, 은근히 복잡하고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오는 작품이라서 영화 보며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관객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개성 있는, 특별한 한국 독립영화
보통 한국의 독립영화라고 하면 무거운 주제와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근래에는 이런 경향에서 탈피해 친대중적인 작품이 부쩍 늘어났는데, 올해 선보인 작품 중에선 '라이브 하드'와 '종착역'이 대표적인 예다.

'라이브 하드'(2018)는 특이하게 흑백 음악영화다. 홍대 근처 라이브 클럽의 무대에 서기 위한 오디션이 열리고, 하나둘씩 모인 뮤지션의 무대 안팎 모습들이 펼쳐진다. 모던록, 헤비메탈, 퓨전 재즈, 블루스, 플라멩코 기타 연주를 오가는 음악은 이 영화에서 얻는 첫 번째 즐거움이다. 이어 가난한 뮤지션들이 삶과 음악 사이에서 벌이는 갖가지 행동을 보노라면 그들의 등을 한번쯤 다독이고 싶어진다. 음악영화로 봐도 좋고 가난한 청춘의 이야기로 보면 더 좋은 작품이다.

'종착역'(2020)의 주인공은 네 명의 중학생이다. 방학을 맞아 ‘세상의 끝’을 담아 오라는 숙제를 안은 사진 동아리 부원 시연, 연우, 소정, 송희는 지하철 1호선의 종점을 향해 떠나기로 한다. 실제 그 나이의 중학생을 캐스팅하고, 영화의 대사를 여정을 거치며 그들 스스로 쓰도록 한 이 작품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진실을 획득한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소녀들의 순수한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듯하다, 그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왕 다큐멘터리라는 말을 내뱉은 김에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내처 소개할까 한다.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골치 아픈 영화일 거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극영화도 그렇지만, 요즘에는 재미있는 다큐멘터리가 적지 않다.
'요요 현상'(2019)은 한때 한국의 요요 대회에서 이름을 날렸던 청년들을 몇 년에 걸쳐 기록한 작품이다.

20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좋아하는 요요에만 매달릴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다. 이후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한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가장 공감하는 층은 또래 관객이겠으나, 폭넓은 연령층을 포섭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정서를 지닌 작품이다. 근거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영화에 환호하는 관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목격했기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울림의 탄생'(2020)은 반세기가 넘도록 북을 만들어온 장인을 바라본다.

신체 장애를 가진 데다 부모마저 잃은, 그래서 거리를 떠돌던 소년이 스승을 만나 북을 만드는 길에 들어선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면 그의 손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긴 세월에 걸친 노고를 고스란히 새겨놓은 듯, 그의 거칠고 단단한 손은 온갖 언어로도 표현 못할 말을 다 전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념하는 거대한 북을 만드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것 자체로 큰 감동을 안겨주거니와, 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들과 벌이는 유쾌한 신경전 또한 소소한 웃음거리를 준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5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이용철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