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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4 컬쳐

도시에 숨다 :: 우리의 평안을 빕니다

2021.12.03 | 명동성당 :: 신을 믿지만, 특정 신을 추종하진 않는다. 종교를 묻는다면 무교이지만, 마음이 가난한 날에는 명동대성당으로 향하곤 한다.

내 마음을 오해했다
한동안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화나는 일도 없었기에 평온한 상태인지 알았다. 나이가 들어서 단단해진 건가 싶었다. 하지만 5일간 현관문을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지금의 감정은 평온이 아니라 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 기상 시간을 포기하고, 집 안 청소를 포기하고, 건강한 식사를 포기하고, 사람과의 만남을 포기한 무기력함.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우 지탱한 삶에는 마음을 둔 곳이 없으니,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생길 리가 없었다.
체력이 떨어진 것과 심신이 게으르고 비겁해진 것, 둘 중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닭과 달걀의 전후만큼이나 가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침전하는 삶의 순간들은 서로가 서로의 인과가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 집 안이 난장판이 되고 수면 패턴이 틀어지고 오전이 없는 하루에 무기력해지고 밤늦게 음식을 먹고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 늦게 일어나고... 사람은 어느 한 부분만 일그러질 리가 없었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상을 나빠지는 채로 방치하고 있었는데, 이걸 평온이라 대충 명명해두었었다. 사실은 소파 위에 쌓인 옷 무덤처럼 제대로 생각하기도, 개선하기도 싫어 던져두었던 것뿐인데.

[©김희진]

잃어버린, 혹은 있었던 적 없던 평안을 찾아서
명동대성당으로 향했다. 언제 와도 내가 앉을 자리 하나쯤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종종 찾는 곳이다. 일단은 대성당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평화로움을 느낀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이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안도감이 드는 공간이다.
내 인생의 첫 성당은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자리 잡은 사크레쾨르 성당이었다. 서른을 앞두고 꽤나 결의에 차 있었던 나는, 인생의 의미는 외국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기대로 나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었다. 하지만 정작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의미를 찾기는커녕,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풍경을 즐길 여유 따위는 전혀 없이, 소매치기를 경계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지하철 표를 사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려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흑인들에게 팔을 내어주는 순간, 팔찌를 강매당하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마치 옆이 보이지 않는 가리개를 씌어놓은 경주마처럼 속보로 걸어 사크레쾨르 성당에 다다랐다.
마침내 성당 안으로 들어서, 길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자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그간의 긴장이 확 풀리면서, 태어나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속에 들어와 있었는데, 불안에 떠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겁에만 질려 있던 내가 바보 같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기도 하고, 혼자 여기까지 온 게 대견한데 이 순간을 나눌 이가 없어 외롭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며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기도의 시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무리는 아멘으로 끝내야 하는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도 되는 건지도 알지 못해서, 이런 내가 감히 기도라는 것을 해도 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물음표들이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일단은 신의 너그러움에 기대,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가만히, 나 자신에게 혹은 이를 들어줄 누군가에게 한참의 이야기를 하고 나자 마음이 잔잔해졌다.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김희진]

사크레쾨르 성당에서의 눈물 바람 이후로
성당이라는 공간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그래서 여행이 끝난 이후 가끔 명동대성당을 찾았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요즘에는 대성당 뒤편의 성모마리아상 앞의 벤치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 벤치에 앉으면 대성당 건물의 뒤편이 보이는데 이 풍경을 좋아한다. 명동대성당 하면 흔히 떠오르는 뾰족하게 홀로 우뚝 솓은 형태의 건물이 아닌, 낮고 뭉뚝한 형태에 정이 간다. 익숙지 않은 뒷모습을 보게 된다는 건 왠지 더 친해졌다는 의미 같아서 마음에 든다.
오늘도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누군가가 눈물을 훔치며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고, 나는 나의 기도를 시작한다. 오늘 하루는 도망가지 않고 맞설 수 있기를, 무턱대고 이루어달라 말하기에는 염치가 없으니 혹시 여유가 되신다면 한 번씩 지켜봐달라고 작게 읊조려본다.
갓 블레스 유. 코로나19 종식과 세계 평화가 찾아오기를, 나와 당신의 안녕을 빌어본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4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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