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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2 에세이

모자 만드는 엄마

2021.01.20 | 사물과 사람

밀리너(milliner)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모자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M은 자신을 밀리너라고 말했다. 아니 ‘밀리너였다’고 했던가? 아니면 ‘언젠가 밀리너가 다시 될 거다’라고 했던가? 어쨌든 내가 M을 만났을 때 그녀는 밀리너가 아니었다. 식당에서 일했고, 요양원에서 기저귀를 갈고 노인들을 씻겼으며, 남의 집 청소를 했다. 시에서 월세 지원을 받으면서 열 살도 안 된 아이 둘을 혼자서 키우고 있었다.

조우
낯선 땅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신비에 가까운 일이다. 5년 전 M을 길에서 만났을 때, 남편과 나는 일주일 동안 이 도시에 머무르면서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알아보고, 살 집을 구하고 있었다. 한 달 후면 우리 식구는 한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이곳으로 이주해 올 예정이었다. 중개업자가 소개해준 집을 보고 골목을 나서는데 저만치에서 자그마한 동양 여자가 예닐곱 살 된 아이들을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 세 명 중에 머리를 빡빡 깎은 사내아이는 칭얼거리는 것 같았다. 중국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옆을 지나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참아, 이제 거의 다 왔어.” 아이는 소변이 급하다고 동동거렸다. 남편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한국 사람입니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M은 그때 이웃 아이까지 맡아서 봐주고 있었다. “근데 그걸 왜 돈도 받지 않고 했어요?” “그냥요.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어차피 우리 애들도 봐야 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이 마을로 이사 온 지 1년도 훨씬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 그녀를 길에서 다시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건 아마 그녀가 동동거리면서 바쁘게 일했기 때문일 거다. 그녀는 착했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

애스코트
M은 꽤 실력 있는 밀리너였나 보다. 런던에 있는 켄싱턴 첼시 칼리지에서 밀리너 과정을 공부했다. 학생 때는 애스코트(Ascot) 모자 경연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애스코트는 왕실의 말들이 참가하는 경마 대회인데, 로열패밀리들이 다 모자를 쓰고 참가해서 밀리너들에게는 꿈의 무대라고 한다. 그녀는 더스티 핑크와 아이보리 색의 1950~60년대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모자를 만들었단다. 작은 리본과 진주알로 장식했다는데 말만 들어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움이 전해졌다. 일련의 불운이 닥치지 않았으면 그녀의 삶은 그렇게 화려했을 거다.

3년쯤 전에 그녀의 작은 부엌 식탁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모자를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아요?” “만들고 싶죠. 그런데 그러려면 머리 모양 나무틀도 더 있어야 하고, 펠트도 사야 하는데 너무 비싸요. 패턴을 만드는 것도 시간이 많이 들고… 아무래도 지금은 어렵죠. 그래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모은 돈으로 재봉틀을 하나 사서 틈틈이 옷 수선 일을 해보려고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재봉틀과 옷감을 만지는 것이 그래도 모자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일일 수도 있겠어요.” 나라면 그 긴 우회가 아득해서 처량한 생각이 들고, 이런 말을 위로랍시고 하는 이웃이 야속할 것 같은데, 앞에서 밝힌 대로 M은 착하다.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언젠가 꼭 될 거예요.” 그녀는 착할뿐만 아니라 밝고 긍정적이다.

열망을 간직하면, 방향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 길에 들어서는 것 같다. M은 지난해에 모자 일곱 개를 만들었다. 지인들이 주문한 것이었다. 그 돈으로 나무 틀을 사고, 펠트를 주문했다. 지금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갈 때까지 (초등학생들은 보호자가 등하교를 같이 해주어야 한다) 꼬박 앉아서 옷 수선을 하고 모자를 만든다. 모자 주문이 더 많아져서 그리로 무게중심이 옮겨지길 바라지만, 조급하지는 않다. 여기까지 오는 데 15년이 걸렸다. 이만 해도 큰 발전이다. M이 꿈을 말했다. “2022년 여름에는 애스코트에 제 모자를 출품해보고 싶어요.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니까, 이제 제 시간이 좀 더 생길 것 같아요.” 그녀의 시간은 항상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다.

<아는 형님>들의 모자
나도 2년 전에 재봉틀을 하나 샀다. M에게서 사용법을 배워서 베갯잇과 식탁보를 만들고 여름옷도 하나 지어 입었다. 얼마 전에 재봉틀을 들고 M의 집에 가서 같이 일을 했다. 나는 오래된 이불 시트를 잘라서 마른 행주를 만들고, M은 새로 산 펠트를 손질했다. 태블릿으로 음악을 듣다가 심심해져서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을 틀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알프레드 가드너의 수필 <모자 철학>이 실려 있었다. 모자 짓는 사람이 두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타인을 재단하고 평가한다는 내용인데, 뒷부분은 가물가물하고 앞부분만 선명하다. 모자 만드는 사람은 정말 두상으로 사람을 판단할까? 내가 아는 유일한 밀리너에게 물었다. “두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겠어요?” M이 말했다. “머리 모양만 보고 사람을 어떻게 알겠어요.” 우문이었다. “그럼 머리 모양을 보면 그 사람한테 어떤 모자가 어울릴지는 상상이 돼요?” “그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자, 그럼 <아는 형님> 멤버들에게는 어떤 모자가 어울릴까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강호동 씨와 서장훈 씨는 맞춤 모자여야 해요. 기성 모자는 사이즈 찾기가 힘들 거예요. 두 분 다 매력이 있어서 그 매력을 부각시킬 수 있는 스타일의 모자를 쓰면 좋을 거예요. 강호동씨는 눈이 강렬하니 강인함과 멋스러움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톱 해트(Top Hat)가 좋겠고, 서장훈 씨는 얼굴형이 잘생겼고 패션 감각이 고급스러우니 스코티시 글렌개리 해트(Scottish Glengarry Hat)가 어울리겠네요. 김영철 씨는 얼굴형이 긴 편인데 두상이 잘생겼어요. 창이 넓은 스타일 모자를 권하고 싶은데 남자분이니 넓은 창을 말아 올린 트리콘 해트(Tricorn hat)를 추천합니다. 김희철, 민경훈, 이상민 씨요? 그 인물이면 어떤 모자도 다 잘 어울리죠.” M은 사람의 매력을 본다. 그러니 그녀가 만든 모자는 단점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빛나게 하는 마술을 부릴 것이다.


무말랭이
M이 점심상을 차려줬다. 밥에 된장찌개, 그리고 무말랭이를 무쳤다. 나는 무말랭이가 좋다. 식감도 아삭하지만, 그 안에 담긴 햇볕이 따뜻하다. 누구나 겨울을 나야 할 때가 있다. 새해다. 세상 모든 M의 꿈을 응원한다.


글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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