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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2 스페셜

삶을 하얗게 태우지 마세요

2021.01.25 |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저자 안주연

번아웃을 경험한 사람들이 건강한 ‘멘탈’을 채워갈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를 쓴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신체와 정신, 나아가 감각마저 ‘하얗게 불태워버린’ 사람들이 번아웃의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선 개인의 노력 그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쉽게 평가하는 우리 사회에서 번아웃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스스로에 대한 호기심을 기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번아웃에 빠지면 심신의 컨디션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학습된 무기력, 즉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게 돼요. ‘그런다고 잘되겠어?’ 하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죠. 제게 어떻게 하면 번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저는 휴식을 권하고 싶은데,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 많이 안타까워요.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라는 책에서 번아웃이다, 번아웃이 아니다라고 나누는 이분법이 위험하다고 짚어주셨습니다. 번아웃에 빠지고 벗어나는 과정을 인지하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하자면 ‘연료 부족 경고등’이 켜졌는데 계속 달리는 거잖아요. 분명 과정이 있을 거거든요. 그걸 왜 못 알아챌까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가 역할이나 당위에 짓눌려 있는 탓이에요. 과로에 시달리니 나를 돌볼 에너지가 없죠. 또 동아시아는 전체주의가 강한 문화권이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건강해야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이 가능하거든요. 말하자면 ‘건강한 자기중심성’인데, 사실 집단주의 사회에선 배척당하는 논리죠. 당위와 역할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보니 순서가 바뀐 것 같아요.

업무에서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대처해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어떻게 보시나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죠. 감정과 이성은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아요. 기업에선 의사결정 등 업무를 할 때 이성적인 면만 발휘하길 기대하죠. 기업의 기대가 전적으로 틀리다고 할 순 없지만, 한 가지 면만 발휘하길 바라는 게 가능한가, 또 합당한가 싶어요. 흔히 감정을 우위에 두는 걸 나쁜 특성으로 여기는데, 이럴 때 감정 표현은 부정적인 것, 회사의 이해에 반하는 의견 등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기득권의 비위에 맞지 않는 거요.(웃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시키는 대로 하고 부정적 반응을 하지 말라는 건데, 반인권적이고 비인간적인 요구라고 생각해요. 회사 경영에도 이로울까 싶어요. 회사의 가장 큰 자원이 직원이잖아요. 감정을 잘 들여다보는 건 사람들의 진정한 욕구를 알아차리는 지표가 되기도 하거든요.

유리 멘탈이니 쿠크다스 멘탈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는 걸 보면 정신 상태가 강인하지 않으면 기준에 미달된다는 인식도 팽배한 듯해요.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책이 있어요. 예민한 게 죄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내용을 담고 있죠.(웃음) 기질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또 누구라도 어떤 자극으로 취약해지면 예민할 수 있잖아요. 둘 다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거죠. 장점도 있어요. 문제를 빨리 인식하고 타인을 잘 이해하죠. 또 민감한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좌절하게 되잖아요. 자연히 ‘쿠크다스 멘탈’이 될 수 있어요. 약해진 상황이니 도움을 받고 쉬어야지 비난의 대상은 아니죠. 심지어 회사를 다니다 그랬다면 회사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잖아요. 유리 멘탈을 이유로 불편해하는 건 토사구팽 아닐까요.(웃음)

오랜 시간 쌓인 피로와 탈진이 짧은 시간에 해결되긴 어려울 것 같아요. 기다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나를 지키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까요.
우리나라가 엄청 ‘빡센’ 사회잖아요. 덜 놀고 일 많이 하고. 느슨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힘든 거죠. 그럴수록 ‘내 인생은 내가 산다.’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아요. 생명체의 특성이 내부의 항상성을 지키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인데, 사람도 생물이잖아요.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리면서 현실에 잘 적응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자신을 긍정하기 전에 세상의 기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이런 내용으로 대화를 나눠봐도 좋겠죠.

번아웃이 소진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어요. 동시에 번아웃을 패배한 상태 혹은 투정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어떻게 보시나요.
우울증과 같아요. 우리 사회는 슬프고 힘든 데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요. 이런 분위기에선 당사자도 ‘난 힘든 게 아닌데 왜 우울하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돼요. 하지만 힘든 데 자격이 필요하지는 않죠. 힘든 것도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일을 더 하지 않기 위한 핑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어요. 일종의 폭력이죠. 지쳤다는 느낌은 모호하지 않고 명확합니다. 당사자는 그걸 알 수 있어요. 우울과 번아웃은 어떻게 보면 몸이 보내는 신호이고, 존중해야 하는 목소리예요. 이 신호를 바탕으로 회복하고 치료해 다시 잘 살아갈 수 있거든요.

탈진과 그로 인한 어려움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번아웃의 정의가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증후군’이에요. 업무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죠.(웃음) 직무로 인한 소진 척도를 만든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매슬랙 박사도 번아웃을 막기 위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해요. 직원이 번아웃을 겪는다는 건 노동환경이 나쁘다는 뜻이잖아요. 직원의 상태를 파악하는 운영자들의 ‘질문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고 봐요. 업무 환경에 대한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는 거죠. 자신의 의견이 일부라도 반영되는 느낌이 들면 조금이나마 번아웃에서 벗어나고, 업무 환경도 좋아질 테니까요.

안주연 지음 | 창비 펴냄 | 2020.11

책에서 스스로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습관이 있을까요.
책에서 제안했듯 자신의 오감을 아주 상세하게 써보는 일기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는 일이 중요한데, 심적으로 힘든 사람은 그게 어렵잖아요. 우리에겐 수많은 감정선과 느낌이 있는데, ‘오감 일기’는 그것을 느끼기 위한 감각의 스트레칭 같은 거예요. 예를 들면 샤워를 할 때 어떤 비누 향이 났고, 수건은 어느 정도로 마른 상태였고…. 이런 자극과 감각을 자세히 돌아보는 결이 생기는 거죠. 단순해진 감각을 사용하고 일깨우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번아웃에 다각도로 접근하는 건 실수를 인정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좋은 팀의 조건’을 알아보기 위해 진행한 연구가 있는데, 생산성을 높이는 조건 중 하나가 ‘심리적 안전감’이었어요. 위험을 감수하고 이야기하는, 실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첫째 조건이라는 거죠. 초대형 IT 기업이 왜 이런 문화를 조성할까요? 회사에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는 없는 문화죠. 하지만 꼭 필요한 조건이에요. 이게 없으면 번아웃을 면할 수 없어요.

책에서 지적했듯 고립되기 쉬운 사람들은 번아웃에 더욱 취약할 텐데, 주변에서 이런 분을 발견했을 때 옆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취약점을 서로 드러내는 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힘들면 한숨이 나오거나 불평할 수 있는데 그랬을 때 평가하지 않고 “그러게, 참 힘들다.” 하는 식으로 호응하면서 서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거죠. 상대가 슬픔을 드러냈을 때 공감해주고 나의 취약점을 상대에게 보여줄 때 세상이 살 만해지는 것 같아요. 가볍게 말을 걸거나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 게 어떨까 싶어요.

자책하면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번아웃은 내가 내게 보내는 구조 신호예요. 잘 들어주고 수용해야 해요. 완전히 소진돼버리기 전에 알게 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고요. 책임감이 강할수록 탈진하기 쉬워요. 번아웃으로 자책할 텐데, 그렇다고 이제까지 들인 수고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거든요. 구조 신호를 잘 듣고 나로서 잘 살아가기 위한 연습을 하길 바랍니다.


황소연
사진제공 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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