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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4(커버 B) 빅이슈

<EDITORIAL> 회복하는 봄

2025.05.16

마감이 끝난 어느 날,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책과 홈 파티라도 한 것처럼 수납장에서 전부 나와 있는 물컵들, 바닥에는 고양이털이 잔뜩 묻은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는 상태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기억상실증인가? 며칠 사이에 집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지. 나는 어지른 기억도 없는데 누가 내 집에 와서 저 많은 허물을 벗고 갔단 말인가. 그만큼 저의 정신 상태가 어지러워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요.

한국의 작가 414명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는 성명을 한 줄로 발표한 것을 보았어요. 소설가, 시인, 평론가, 에세이스트 한국의 여러 작가들이 답답함을 촌철살인의 한 줄로 정리한 글들이었죠. 김초엽 소설가는 “제발 빠른 파면을 촉구합니다. 진심 스트레스 받아서 이 한 줄도 못 쓰겠어요. 빨리 파면 좀!”이라고 썼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친구들 중에서 당신을 견뎌낼 수 있는 자들 앞에서나 날뛰세요. -소포클래스, 〈안티고네〉에서”라고 썼습니다. “헌법재판관님, 어려운 거 없잖아요. 비상계엄으로 헌법을 무시했고, 민주주의를 파괴했어요. 그런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김중혁 소설가는 썼고, “늦어도 다음 주 이맘때에는, 정의와 평화로 충만한 밤이기를.”이라고 김연수 소설가는 썼습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한강 소설가의 글인데요.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습니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가 그 내용입니다. 나머지 내용들도 ‘작가 성명서’로 검색하시면 온라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라면 뭐라고 썼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다른 작가님들처럼 위트도 있으면서 누가 내 마음을 대신한 것 같은 속 시원한 한 줄은 나오지 않더라고요. 글도 쓸 수가 없다.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집도 치울 수가 없다. 일도 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상식이 파괴되고 있다, 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매해 봄이면 찾아오는 무기력이 올해는 다른 형태로 저를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래도 힘을 내서 살아야지, 라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나날입니다. 그런 의미로(응?) 이번 호에는 작지만 단단하게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20대 사이에서 과소비보다 유행한다는 ‘안티 플렉스’를 특집 기사(16p)로 준비했고, 전세사기 피해자로서 법안 제정과 피해 보상을 위해 계속 싸우고 있는 서은하 씨의 인터뷰(28p), 집 앞 공원의 목련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 중인 유지영 기자의 글(88p)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저를 일으켜 세우는 것들은 용감하게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들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들 같아요. 봄이니까 밝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어렵네요. 신간이 독자들 손에 쥐어졌을 때에는 우리 마음에도 진짜 회복의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장. 김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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