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 정창식 씨의 이야기
“얼마 전에 전세사기 피해자 한 분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내가 그때 더 작은 집을 찾았으면 전세사기를 안 당했을까요. 세상이 괜한 피해자 탓만 해요. 조건 맞는 집 찾는 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다 할 정부 대책은 없고 우리만 절실하니까.”
결혼 후 살던 첫 집에서 첫아이를 얻었다. 여유 없는 집에서 태어나 꿈을 포기하고 돈 때문에 직업을 선택했지만 포기가 습관이 된 그는 차근히 삶의 주름을 펴가며 어른이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두 번째 전셋집을 찾을 때는 다급했다. 집이란 게 세입자 사정대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가진 돈으로 겨우 이사 갈 집을 찾았고 시간이 부족해 전세보증보험 가입도 하지 못한 채로 날벼락을 맞았다. 잠시만 살고 옮겨 갈 집이라고 생각했던 그 집이 전세사기였다. 책임자들은 나몰라라 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는구나, 매일 목이 조이는 기분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다고 창식 씨는 말했다.
일을 하기 위해 15층 건물 옥상에 들어서면 땅부터 살핀다.* 40m 허공에서 보는 땅이 딛고 서 있을 때와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할 일에 집중한다. 작업 줄 내릴 위치를 확인하면 옥상에 고정해야 한다. 작업 줄은 딱 손가락 굵기 정도의 로프, 전용 고리가 없는 옥상이라면 작업 줄의 하중을 충분히 견딜 만한 물체에 대신 고정해야 한다. 그다음 작업 줄이 땅까지 닿는 걸 확인한다. 역시나 구조상 여의치 않은 건물도 있다. 경험이 중요하다. 이런저런 변수를 극복하며 무사고로 일한 지 어느덧
5년 차, 정창식 씨는 건물 창틀 보수를 주로 하는 로프공이다.
원래는 서른 즈음 전자 IT 업계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미대 입시 대신 전공한 게임 그래픽으로 1년간 취업 준비에 공을 들여 잡은 기회 앞에서 급선회했다. 서울에 있는 게임 회사의 낮은 초봉은 대전 토박이인 그에게 높은 장벽이었다. 성장 시기에 생활은 노력만으로 피는 게 아님을 체득한 그였다. 같은 처우를 보장해주는 대전의 중소기업에서 직장인이 되고(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오히려 일의 목표는 뚜렷해졌다. 돈을 모으고, 결혼을 하고, 집도 가지고 싶었다. 전략적으로 첫 월급부터 ‘월 15만 원’ 외 소비를 원천 차단한 결과, 마흔 즈음엔 원하던 가정을 꾸릴 밑천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혼집 운이 좋았다. 품질 좋은 ‘집주인 세대’ 매물을 신중하게 기다려 잡았다. 죽은 공간 하나 없는 복층에만 방이 두 개, 쓸 만한 테라스까지 딸린 집은 아이 낳을 것까지 고려해도 충분한 곳이었다. 심지어 ‘쿨한’ 집주인에 더 마음이 놓였다. 전세권 설정을 요구하는 세입자를 ‘노여워하지’ 않던 집주인은 4년까지는 살고 싶다는 신혼부부에게 더 오래 살라고 안심시켰다. 보증금을 대출 없이 치른 건 지난날의 선택과 집중 덕분이다. 로프공으로 전업한 건 이 집에서 첫아이를 얻은 이후였다. 얻고 보니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든 행복 그 자체인 첫아이가 쑥쑥 크는 모습을 보며 결단이 내려졌다. ‘목숨수당’의 대가는 무거웠지만 첫아이가 세 살 될 무렵 그 무게를 한 편에 두고서 나름의 여유도 찾게 되었다. 투잡을 시작했고, 아내 뱃속에서 자라는 둘째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세입자라서 슬픈” 상황에 닥친 건 임대인의 탓도,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임대차 3법’ 발표 직후 상당수 임대인이 임차인의 계약 갱신을 거절하며 발생한 ‘전세대란’이 문제였다. 본인이나 직계존비속이 실거주할 경우에는 임대인이 임차인의 계약갱신청구권을 거절할 수 있다는 ‘법의 구멍’이 임차인을 대거 전세시장으로 토해냈다. 창식 씨 부부도 그중 하나였다. 매물이 귀해 하루가 달리 가격이 뛰는 전세 시장에서 ‘두더지 게임’을 하듯 전셋집을 잡고 놓치고 찾고 놓치느라 “세입자는 집을 고를 수 없었다.” 신중할수록 보증금 부담이 늘어나는 시장 상황에 산달을 앞둔 부부가 완전히 안전하게 들어갈 집은 없고, 그마저도 급등한 시세에 대출이 필수였다. 버팀목 대출**을 끌어와 들어간 다가구 집은 HUG 전세보증금반환보험까지 나오진 않았다.
1년여가 지나도록 테라스 방수 공사를 마치지 않아 불안불안하던 새집이었다. 청약에 당첨된 주택 입주 전에 한 번 더 다른 집을 거치더라도 계약 연장은 하지 않기로 했는데, 집주인이 연락 두절이었다. 상호 연장 의사 없음까지 확인한 임대인이었다. 차례차례 낼 중도금 상환보다도 당장 상환하라는 대출금이 문제였다. 경매로 넘어간 집은 1년도 되기 전에 낙찰되더니 새 건물주가 전세 임차인들에게 이삿날을 일괄로 정해 통보하고 내용증명으로 압박했다.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는 구체적인 피해를 해결하느라 본업 수입이 많이 줄었고, 경매 낙찰대금으로 배당받은 돈은 보증금의 반이 됐다. 이제 새로운 전세 보증금은 80%가 대출이고, 지인에게 빌린 돈도 남았다. 정창식 씨 식구를 받쳤던 ‘순도 100’의 기반은 임차인을 보호할 의도로 만들어진 법의 구멍 속에서 5분의 1로 졸아들었다.
*인터뷰는 2024년 5월 10일에 진행했다.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은 근로자 및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한 전세자금 대출 상품으로 주택도시기금이 재원이다.
유년 시절의 자랑이었던 엄마의 분식‘집’
대전 토박이예요. 시골에 있는 과수원에 세 들어 산 적도 있는데, 그땐 집 안에 돼지나 소 우리, 닭장 같은 게 있었던 게 생각나네요. 집에 대한 기억이 확실한 건 어머니가 도마동에서 분식집을 했던 때부터고요. 대여섯 살에 어머니가 가게를 여시고 오랫동안 하셨거든요. 가게에 주거가 딸려 있었고요. 상가 건물에 있는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테이블이 몇 개 있고, 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이 있는 거죠. 방 안쪽으로 안방이 또 있었을 거예요.
장사가 제법 잘됐어요. 근처에 큰 공단이 두 개나 있었거든요. 우리 가게가 특이하게 햄버거도 팔았어요. 아이스크림까지 들이면서 학교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형이랑 저랑 친구들한테 아이스크림을 막 퍼주다 몇 번 혼난 기억이 있어요. 회사 택시를 운전하시던 아버지도 개인택시를 모시면서부터는 부모님 벌이가 다 좋아지셨어요. 그러다 IMF가 터졌어요. 공단이 빠지고 분식집 운영이 어려워졌고요. 아버지도 개인택시를 처분하고 버스 회사 직원으로 들어가셨어요. 결국 분식집을 접고 배재대학교 근처 반지하 집으로 이사를 갔죠. 가게를 거의 10년을 하신 건데… 어머니도 음식점 같은 데로 일을 나가신 걸로 기억해요.
영화 〈기생충〉 속 반지하가 그때 우리 집이랑 똑같더라고요. 특히나 화장실 구조가. 물도 잘 안 내려가거니와 벌레가 엄청 나왔어요.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에 곱등이 같은 것들…, 정말 질색이었죠. 비가 많이 오면 집에서 발목까지 물이 차고. 그래도 좋은 부모님이셨어요. 심적으로 힘드셨을 텐데, 저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 시기에 어머니가 술을 좀 드셨거든요. 원래 한 잔도 못 드시던 분이. 반지하 집에 살 때 군대를 갔는데 제대할 땐 다행히 부모님한테 집이 생긴 상태였어요. 결혼할 때까지 그 집에 살았고요. 70~80년대 많이 지어진 빨간 벽돌 주택 있잖아요. 가계 사정이 확 핀 건 모르겠고, 지인들이 싼 매물을 알려줘서 앞뒤 안 보고 취득하신 거 같아요. 축대 위에 있어서 전망이 참 좋았죠. 작았고요. 옥탑방이 있어서 세를 받고 네 식구가 방 두 개짜리
1층에 살았거든요. 마당이라고 하긴 좀 뭣해도 집 앞에 두 평 정도 되는 공간에 수도가 있어서 거기서 빨래할 수 있고, 감나무가 있었어요. 옛날 주택들은 그렇게들 감나무를 심었잖아요. 너무 커서 결국 벴죠. 해를 가리고 여름에 벌레가 많이 나와서.
방을 혼자 써본 건 3년 정도? 작은 방을 형이랑 같이 쓰다가 형이 결혼했어요. 잘 때마다 불 끄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고, 좋은 게 많았죠. 좋아하는 영화도 밤새도록 보고. 진짜 많이 봤어요. 종일 여덟 편 넘게 내리 본 날도 있고, 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샅샅이 뒤져서 보고. 그러고 보니 거기서 꽤 오래도 살았네요. 거의 15~16년을 살다 결혼했으니까. 부모님은 지금도 사세요.
‘하고 싶은 일’로 직진하기엔 너무 비쌌던 ‘서울살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빨리 인지했어요. 반지하로 이사한 것도 이유겠지만 일단 학교에 가면 나보다 훨씬 부잣집 친구들을 보잖아요. 그 친구가 가진 걸 부모님한테 요구했다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피부로 느끼는 거죠. 괴로웠다기보단 ‘우리 집 현실이 그렇구나.’ 그냥 그 정도였어요. 어려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빨리 잘되겠다고 생각했고요. 돈 때문에 예술 쪽으로 진학을 못 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도 공고 기계과 다닐 때도 선생님들이 미대 쪽으로 진학을 권하셨는데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사실상 부모님이 거절하셨고요. 내심 미대에 가고 싶었어도 크게 상처받진 않았어요. 하고 싶으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정리했거든요. 원하던 게임 그래픽 전공으로 대학도 가서 그쪽으로 취업한다고 나름 투자했고요. 졸업하고 안양 이모 집에까지 살면서 강남으로 학원을 1년이나 다녔으니까. 그렇게 했는데 결국은 업계 문턱에서 방향을 틀었어요. 학벌 좋은 경쟁자들이 많았거든요. 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걸 체감했던 거 같아요.
서른에 첫 취업이었어요. 계속 만화 쪽으로 공부해서 그래픽이나 콘셉트 아트 쪽으로 지원했더니 기회가 왔거든요. 게임 회사에서 취업 마지막 과정을 통과하고 연봉을 알려주는데 초봉이 2,400만 원이었어요. 저로선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오는 돈인 게, 서울에 집을 얻어야 하니까요. 저는 연애도 하고 싶고 차도 갖고 싶은데.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나 생각해보면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때마침 대전에서 중소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회사에 자리가 났다고 오라고 했고요. 열차 객실 통제 시스템을 공급하는 전자 IT 회사였는데 연봉도 맞춰준다고 했고, 살던 집에서 출퇴근할 수도 있고. 생활 면에서 훨씬 유리하단 판단이 들어서 그 일을 선택했어요. 좀 생뚱맞죠. 하고 싶은 일은 돈부터 벌고 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자기만족이니까, 열정만 있으면 언젠가 할 수 있는 거니까.
돈 때문에 선택했으니까 혹독하게 돈을 안 썼어요. 작정하고 월급날 용돈 15만 원 빼고 전부 어머니한테 맡겼거든요. 돈 쓸 경로를 아예 차단하려고. 결혼 생각이 뚜렷한 편이라 애인 있기도 전부터 계획적으로 돈을 모으면서 계속 부모님 집에서 산 거예요. 독립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돈 모으긴 어려우니까. 자금이 있어야 장가를 가죠. 그다음에 차도 사고, 결국 집도 사는 거고요. 처음 취직했을 땐 어느 세월에 집 얻을 돈이 모일까 까마득했는데 8년을 하니까 차곡차곡 모이더라고요. 회사 팀 동료들이랑 회사 독립도 해보고, 좀 늦었지만 결혼도 했고요.
신혼집에서 아빠가 됐고, 로프를 타기 시작했다
신혼집은 좋은 기억이 참 많아요. 집을 구할 때부터 공간에 여유가 있는 집을 찾았거든요. 아내가 따로 갖고 있던 화실을 집에 두기로 해서. 다가구 빌라에 괜찮은 주인 세대 매물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간혹 있거든요. 그런 집은 컨디션도 좋고 십중팔구 야외 테라스도 있고. 딱 맞아떨어지는 집이 나오더라고요. 복층인데 누다락 없이 면적만큼 다 쓸 수 있는 집. 방 두 개 중에 안방은 33평형 아파트 안방 베란다를 확장한 정도로 컸어요. 보증금 1억 8000이면 시세 안쪽이었는데 임대인도 좋은 분이었어요. 가급적 4년 이상 살고 싶다고 했더니 더 오래 살라면서 전세권 설정도 흔쾌히 해주시더라고요.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어서 여차하면 집을 더 볼 각오로 물어본 거였는데.
테라스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겠다고 설레서 6인 테이블에 파라솔까지 설치했던 기억이 나네요. 두 번 쓰고 ‘생각하는 의자’로 전락했지만.(웃음) 집들이 때마다 지인들이 놀라면서 집이 너무 좋다고들 해주니까, 그것도 참 기뻤어요. 뭐니 뭐니 해도 그 집에서 첫째를 만난 거, 첫아이 태어났을 때 행복감은 표현할 길이 없네요. 아내도 아이도 건강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 인생 행복은 다 이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땐 살이 제일 많이 쪘던 거 같아요. 처음으로 80kg 중반을 찍었으니까요.
아빠가 되고 얼마 안 있다가 직업을 바꿨어요. 독립한 회사에서 5년 정도를 일했는데 새로운 기술은 계속 나오고, 때맞춰 새로운 아이템으로 갈아타지 못하면 금방 도태될 거고. 불안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키워야 할 아이도 있는데, 쉰 살 전에는 뭔가 발전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완전히 새로운 일을 배웠어요. 로프를 타고 아파트나 빌라나 고층 건물 옥상 외벽을 내려가면서 수선이 필요한 창틀을 손보는 일인데, 갑자기 선택한 건 아니고요. 먼저 전직한 첫 직장 선배가 권했거든요. 위험하긴 해도 시간 투자 대비 수익이 높다고. 수요도 계속 있고, 이게 아직 대체가 안 되는 전문 기술이에요. 현장 바로 가서 서너 번까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다가 다음 날로 바로 줄을 탔어요.
처음 6개월은 억만금을 줘도 하기 싫다는 생각만 계속 들더라고요. 직장 출퇴근 때보다 훨씬 일찍 나가서 일할 준비를 마치고 나면 한 번 일을 하고도 온몸이 아릴 정도로 긴장이 심했거든요. 구조상 옥상에서 내린 로프가 땅에 닿는 게 안 보이는 건물도 있어서 처음엔 로프 내릴 위치 잡고, 로프를 얼마나 내릴지 결정하는 것부터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바닥까지 로프가 안 닿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줄 타고 다시 올라가거나. 산업용 장비들이 꽤 비싸고 좋은 거라 이 정도면 괜찮겠다 안심이 되다가도 막상 일을 시작하면 너무 무서워서 로프를 필요 이상으로 꽉 잡으니까 힘들죠. 저는 직선이 아니라 시계추처럼 좌우를 움직이면서 내려가는 작업을 하거든요. 이쪽이 업계에서도 비교적 공급이 적어서 벌이가 더 높아요. 위험수당 때문이죠. 팔다리가 벌벌 떨리고 경련이 오고 알이 배기고. 처음엔 속도도 안 나요. 너무 싫지만 어쩌겠어요. 계속 내려가다 보니까 이 일도 몸에 익고, 나름 여유가 생기는 거예요. 로프 타고 내려가는 순간이 편안하기도 하고 재미도 생기고. 점점 신규 시공도 들어오고, 개인 건수 외에 단체 건수도 들어와서 동료랑 공동 작업하는 날도 생겼어요.
처음 1~2년은 선배 따라다니면서 배웠는데 벌써
5년째네요. 경력이 쌓인다고 100% 장담할 순 없는 일이죠. 손가락 굵기 로프에 체중을 싣고 20층, 30층 건물 꼭대기에서 내려오다 보면 미처 대비 못 한 일도 생길 수 있으니까. 여태껏 실수 없이 했어도 내일은 또 모르는 거거든요. 일하러 갈 때마다 가족들도 걱정하고, 사실 갈수록 힘에 부치긴 해요. 체력 단련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엄마가 주양육자여도 아빠도 함께 육아를 하니까요. 인생이라는 게 참…, 수입을 늘리겠다고 코로나19 때 대학교 앞 식당을 인수하면서 투잡을 시작했는데 매출 올리기가 예상보다 더 어려웠어요. 품만 더 들어가서 정리하는 과정이었는데 전세사기까지 당하게 됐네요.
“세입자는 집을 고를 수 없었어요”
계획에 없던 이사였어요. 그 복층 집에서 4년째 잘 살고 있었는데 임대인이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됐다고 했거든요. 그때가 ‘임대차 3법’ 발표했을 때라…, 세입자로서 그냥 좀 슬펐던 거 같아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사정이 급변해서 생기는 일이니까. 때마침 아내의 둘째 산달도 얼마 안 남았고, 첫째도 세 살이라 한창 손이 많이 가고.
세입자는 집을 고를 수 없었어요. 한 번에 이동이 많아지니까 값이 막 뛰고 매물은 귀해졌거든요. 하룻밤 지나면 1~2000만 원, 또 하룻밤 지나면 3000만 원이 오르는 거죠. 1억 5000에서 2억 안에서 구할 수 있던 전셋집 기본이 2억 5000이 되고, 아파트는 넘사벽이었고. 제일 싸다고 본 집이 2억 3000인데 너무 후지고 좁고. 지나쳤다가 너무 집이 없어서 되돌아갔더니 3000만 원이 올랐고…. 그런 식으로 한 달 내내 집만 봐도 매물이 없었어요. 살던 집에서 짐은 빼야지, 아기는 나올 때가 됐지. 결국 완공 전에 계약한 게 지금 집이에요. 공사 문제로 안 한다고 했다가, 처음보다 가격만 오른 상태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했고요. 2억 5000에서 2억 8000이 됐는데, 3억 되는 건 시간문제잖아요. HUG 전세보증금반환보험 가입은 거절 당했지만 신혼부부 버팀목 전세자금대출은 나왔어요. 모아놓은 돈에 더하고, 어머니도 돈을 건네주셨어요. 갑자기 1억 만드는 데도 쩔쩔맸는데 안전장치까지 걸 여력이 어딨어요.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약 기간만 버티고 바로 나간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거예요.
입주하고 한 달 정도는 조금씩 보완하는 거 같더니 2년이 넘도록 아직도 테라스 방수는 안 된 상태에요. 당연히 밑에 집에 문제가 생겼죠. 우리 집도 부분부분 곰팡이가 피고. 임대인한테 여러 번 말해봤자 소용없었어요. 건축주랑 분쟁 중이라면서 책임을 계속 미뤘거든요. 애초 계획대로 이 집을 빨리 떠나자고만 생각했죠. 마침 1년 반 정도 살다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고, 20년간 부은 청약 통장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어요. 계약금이랑 2차 중도금까지 내고 임대인한테 이사 나간다고 알렸어요. 답도 받았고요. 임대인도 처음부터 계약 연장 의사 없었고, 우린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중도금도 치를 겸 더 저렴하고 안전한 구축에서 전세를 한 번 더 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계약이 종료되는 달이 되고 임대인한테 연락을 해도 계속 안 받더라고요. 느낌이 이상해서 집 등기부등본을 출력했더니 이미 건물이 임의경매에 넘어간 상태였어요. 하늘이 노래지는데, 그때부터 다달이 삶이 무너지더라고요.
자살하는 사람들 심정을 1도 이해 못 하고 살다가 조금 알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버팀목 대출이라 자산이 2000만 원이 초과해서 연장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당장 안 갚으면 하루하루 이자에 연체금까지 물린다는데 수중에 정말 한 푼도 없었어요. 중도금 치르는 데 돈이 다 들어갔으니까. 어머니 돈까지 들어간 보증금까지 떼이고,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얼마나 막막한지. 얼마 전에 전세사기 피해자 한 분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대구 사는 아기 엄마인데…, 그분 상황이 십분 이해 가죠. 여차저차 지인들 힘을 빌려서 대출금을 겨우 막았는데, 그러고 나니까 내용증명이 계속 날라오더라고요. 이번엔 경매로 우리 건물을 낙찰받은 새 건물주 쪽이었어요. 이삿날 통보하면서 안 나가면 이후로 매일 보증금의 1%씩 청구하겠다고. 연락도 안 받는 건지, 통화 시도를 여러 번 해서 어렵게 소통이 됐어요. 전부 월세로 돌릴 계획이라고 하길래 이삿날이라도 조금 조정받은 거예요. 3일 뒤고요. 결국 테라스 방수 공사가 되는 걸 못 보고 이 집을 나가네요. 그동안 안 쓰고 아껴서 모은 보람도 없이 보증금 대출이 80%가 됐어요.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아파트 전세를 구했거든요. 다가구 전세는 사기 트라우마에요. 내 돈으로 차곡차곡 중도금 치른다는 계획은 다 옛날 이야기고 입주 때까지 모자란 비용도 숙제로 남았어요.
떼인 보증금은 피해자들 ‘인생값’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해요. 애초에 규모를 확 줄여서 훨씬 작은 전셋집으로 갔어야 하지 않냐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라는 게 참 쉬워요. 살림살이를 다 처분하는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래요. 식구는 더 늘었고요. 3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 버리고 좁은 집으로 몸만 들어갔다고 전세사기를 안 당했을까요? 대전이요, 인구 대비 전세사기 피해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에요. 잘못은 다른 데 있는데 괜한 피해자 탓만 하는 거죠. 조건 맞는 집 찾는 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알릴 수만 있다면 전국 팔도 어디든 내 얼굴 내 목소리를 다 팔아서라도 알리고 싶었어요. 피해 초기만 해도 이렇다 할 정부 대책은 없고 우리만 절실하니까. 그나마 총선 훨씬 전부터 정의당이, 그다음엔 민주당이 간담회를 열어서 피해자 현황을 듣더라고요. 그것도 반복되니까 사람들이 점점 안 나오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 중심으로 대전 지역 피해자 대책위를 구성했어요. 대책위 활동에 여기저기 방송 출연에 식당 일까지 병행하느라 로프 타는 건 한 달에 두세 번 겨우 했어요. 집중을 해야 공중에서 사고 없이 일하는데, 일이 손에 안 잡히니까. 생업까지 밀리고 몇 날 며칠을 시위에 서명운동까지 해서 시장 면담 한 번을 했네요. 조례로 피해자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받았고, 어렵게 만난 시장이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노력하겠다니까 우선은 믿어야죠.***
한국은 부동산으로 부를 불리는 구조잖아요. 국회의원들조차도. 1년 넘게 관공서나 법원 출입문이 닳도록 다니면서 피해자만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책임자들을 거의 못 봤어요. 여당 국회의원들은 전세사기 심각성을 별로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고요. 전세사기가 없던 일도 아니고, 겉잡을 수 없이 피해가 커져서 그나마 주목이라도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은행 같은 금융 기관은 손쉽게 짐을 떠넘기고, 피해자 개인만 소리 없이 무너졌던 거니까. 이렇게 허술한 제도에 기가 차죠. 제도 개선까지 갈 길이 먼데 당장의 피해 회복에도 소극적으로 나오는 책임자들을 보면…. 아무것도 개선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피해자들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 같아요. 최근엔 대전에서 40억대 전세사기를 벌인 일당 두 명이 1심에서 겨우 9년씩 선고를 받고 바로 항소를 했더라고요.**** 결혼 전에 10년 그다음에 10년, 제 20년 인생에 다른 피해자들 인생까지 더한 값을 홀라당 편취한 범죄자들은 고작 몇 년 살고 나오면 끝이라니. 포기할 수 없어요. 못 받은 보증금은,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 2025년 4월까지 대전시에 신고된 전세사기 피해 건수는 4200여 건이다. 이 중 피해로 인정된 것은 3300여 건, 피해 보증금은 3500억 원에 이른다. 올해 신고된 전세사기 피해는 500여 건, 피해 결정 건수는 200여 건이다.
**** 사회초년생들을 노려 전세사기를 벌인 임대업자와 브로커 일당의 2024년 5월 24일 항소심 재판에서 형량이 각각 징역 7년과 3년 6개월로 대폭 감해졌다. 그 이틀 전인 22일에는 수도권 일대에서 세입자 31명으로부터 70억여 원의 보증금을 가로챈 일명 ‘2400 조직’ 일당 3명도 10년 이하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이날 전국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는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세사기 범죄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규탄했다. 7월 8일에는 대전전세사기피해자 대책위원회(대책위)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민주당·진보당·정의당 대전시당 등이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세사기 범죄자들에 대한 법원의 엄벌을 촉구했다.
글. 오지은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재밌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밥과 빵은 직접 지어 먹는 사람.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