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같은 사람이 아이를 안아도 되겠습니까?”*
정영수,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나온 백승수(남궁민)의 대사.
1.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났다. 그것도 쌍둥이가. 품에 안은 두 아이는 몹시 작아서 나와 아내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비밀리에 방문한 신비한 정령 같았다. 이제 나는 돌이킬 수 없이 아빠가 되었구나.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가슴이 마구 울렁거렸다.
결혼해서 제주로 내려올 때만 해도 딱히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아이를 기르는 일보다 둘이 놀고 즐기는 게 우선이었다. 우리는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과 바다에서 놀고 술을 마셨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숲길을 걷고 술을 마셨다.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며 술을 마셨다.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한 기념으로 술을 마셨다. 제주가 갑갑할 때는 해외로 떠나 술을 마셨다. 그렇게 신나게 10년을 놀고 난 후, 나와 아내는 우리의 마음이 미묘하게 변했음을 깨달았다. 노는 게 재미없다거나 즐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도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즐거움뿐이리라. 아무리 아는 맛이 무섭다지만 남은 인생길 이미 다 맛본 재미투성이라면 과연 그 길을 설레며 걸을 수 있을까?
장정일은 소설 〈보트 하우스〉와 〈구월의 이틀〉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지옥론’을 펼친 바 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반복은 지옥이다. 지옥은 반복이다.” 만약 당신이 마녀로 몰려 당장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진다고 쳐보자. 당신에게는 그 상황이 이미 생지옥일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당신의 고통은 일회적이다. 당신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고통도 함께 사라질 테니까. 그것은 진짜 지옥이 아니다. 진짜 지옥이라면 오늘 끓는 솥에 던져진 당신은 내일도 한 치 오차 없이 끓는 솥에 던져져야 하며 모레도 마찬가지다. 지옥은 우리를 강렬한 고통에 빠뜨리기 때문에 지옥인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영원히 반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옥인 것이다.
삶이 무의미한 반복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삶을 지옥처럼 생각한다. 오늘날 여행은 그 지옥에서 우리를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진정제로 각광받고 있다.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을 순간적으로 파열시켜 우리의 가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물론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예정된 일정이 끝나고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반복의 덫에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복이라는 지옥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장정일은 말한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그러나 사랑은 도래하는 메시아처럼 세속의 크로노스(Chronos)를 일거에 정지시켜 우리를 그 덫으로부터 구원해주지 않는다. 다만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은 반복을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 그 자체를 사랑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반복이라는 지옥에서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예상되는 미래의 즐거움에서 반복의 지루함만을 상상하게 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랑이 아닐까? 물론 서로를 더욱 깊이 사랑함으로써 반복의 덫을 돌파하는 선택지도 가능하겠으나 우리는 낯선 사랑의 대상을 발명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두 명의 아기가 우리 곁에 찾아왔다.
아이를 기르는 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반복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세 시간마다 두 아이 수유를 하고 소화를 시키고 기저귀를 갈고 울음을 달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반복 안에서 기꺼이 행복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는 우리가 사로잡힌 반복의 굴레 속에서 비로소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사랑의 변주곡〉에서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고 썼다. 사랑은 사랑을 먹고 사랑을 낳길 반복한다. 사랑은 반복을 통해 증식하고 그것은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증폭한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힘겨운 반복을 기꺼이 다시 체험하고 싶어 한다. 니체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신생아를 돌보느라 퀭한 몰골로 ‘영원회귀’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2.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과도하게 염려하고 한발 앞서 전전긍긍한다. 일종의 신경증을 앓고 있는 셈인데 아이가 태어난 직후 내 불안은 최고치를 찍었다. 가장 큰 걱정은 운전이었다. 나는 운전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라 이제까지 운전은 아내의 몫이었다. 하지만 제왕절개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내에게 직접 조리원까지 운전해서 가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운전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기 전 태어난 지 5일 된 신생아를 바구니 카시트에 담아 차에 태워야 했다. 나는 또다시 두려워졌다. 카시트를 들고 가다 걸음이 꼬여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이를 담은 카시트를 놓쳐서 아이가 바닥에 곤두박질이라도 친다면? 겨우 아가들을 차에 태운다 해도 운전에 미숙한 내가 사고라도 낸다면? 설령 내가 사고를 내지 않아도 어떤 정신 나간 차가 내 차 뒤꽁무니를 박아버린다면? 요새 싱크홀 사고가 빈번하다던데 갑자기 땅이 꺼져버린다면? 평소에는 내 걱정과 불안을 담담하게 잠재워주던 아내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 자기만 잘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내의 말이 맞았다. 나는 조리원까지 무사히 운전했으며 일주일 뒤 조리원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두 아기를 무사히 집에 데려다 놓자마자 곧바로 다른 불안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안고 내려놓길 반복해야 하는데 혹시 그 과정에서 아기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앞선 걱정들과 달리 이 걱정은 나름 현대문학적 근거를 갖춘, 지극히 비평가스러운 걱정이었다. 나는 정영수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내일의 연인들〉, 문학동네, 2020)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사고를 강박적으로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이를테면 중앙차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오던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정면으로 돌진해 온다거나, 아파트를 나서는데 23층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고무나무 화분에 머리를 맞는다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서.(어쩜 나랑 이렇게 똑같은지!) 그렇지만 그가 사로잡히는 불안에는 어딘지 기만의 냄새가 풍긴다. 그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면서도 “그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그런 확신까지 갖고 있진 못하다.) 그가 하는 끔찍한 상상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안온함과 평탄함을 현실에서 자각하게끔 도와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가 즐겨 하는 끔찍한 상상은 주체가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는 불안과 공포를 상상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어작용쯤으로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되는 것처럼 그의 끔찍한 상상이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통해 현실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이유정이라는 친구의 출산을 축하해주기 위해 약혼녀 선영과 함께 이유정의 집을 방문한다. 이유정은 그에게 아기를 건네며 한번 안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그는 “그래볼까, 아냐 관둘래.” 사이에서 어물쩡거리다 손을 거두는 바람에 이유정의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만다. 추락의 충격으로 인해 두개골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아이는 회복될 수 없는 장애를 얻게 된다.
그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득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학적인 자책에 빠져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일상은 예전처럼 굴러간다. 그는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서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고 선영과의 결혼 준비도 차근차근 해나간다.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일상이 지닌 관성이 그만큼 무겁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은 이제 두 부분으로 분열된다. 한쪽에 그가 저지른 사고의 결과 병원에 입원한 아기와 그의 부모의 현실이 존재하고 반대편에 일상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의 현실이 존재한다. 그는 이렇게 분열된 현실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한다. 그는 이유정의 현실에서는 방관자로 존재하고 일상의 시간에서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죄인으로 존재한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그는 이유정과 그녀의 남편을 찾아가 오열하며 용서를 빈다. 하지만 이유정과 남편은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말하며 그의 사과를 접수하지 않는다. 아이의 병원비를 모두 부담하겠다는 그의 제안도 단칼에 거절한다. 이유정과 남편이 그의 사과에 선을 긋는 이유는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다면 사고의 책임은 명백히 그에게 귀속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유정과 남편은 평생을 때로는 그를 죽일 듯이 원망하고 때로는 그를 용서하기 위해 애쓰며 살게 될 것이다. 이유정과 남편은 자신들의 남은 삶을 그의 죄책감이 드리운 그늘에 침식되기를 거부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선영과 결혼한 이후 그는 이유정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으며 “마치 그 일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끼기까지 한다. 그는 그 이유를 그 끔찍한 사건이 결국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데서 찾는다. “그 일은 참혹하고 불운한 일이었지만 내게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내가 겪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따금 사로잡히는 강렬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끔찍한 사건을 야기한 당사자지만 이후 사태의 수습에 아무런 책임을 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무력한 방관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3.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을 윤리적 주체의 한계를 흥미롭게 사고 실험하는 작품으로 읽었다.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종내 무기력한 방관자로 머무르는 주인공의 모습은 죄의식과 죄책감이 주체의 윤리적 각성을 촉발하는 심리적 기제일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윤리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지 않는가? 그때 내 감정은 주인공에게 이입되었다. 나와 비슷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인물을 만난 것도 반가워서였을까.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마음도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아이를 낳고 다시 이 소설을 읽자 이유정과 그녀의 남편에게 더욱 마음이 쏠렸다. 만약 우리의 아이에게 불의의 사고가 닥친다면 나는 이유정과 그녀의 남편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이유정과 그녀의 남편은 이 소설에 작은 흔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죄책감에 시달리기 바쁜 일인칭의 서술자는 그들의 속마음에 대해 친절한 서술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유정과 그녀의 남편은 주인공이 시달리는 사변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힐 여유가 없을 거란 사실이다. 그들은 아이에게 일어나 문제를 어떻게든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주체니까.
아기는 태어난 지 두 달쯤 되었고 이제 아기를 안고 어르는 일엔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아기를 안다가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얼른 달래줘야 한다는 현실의 의무 앞에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나는 아빠가 된 후 내가 조금 변했음을 실감했다. 나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끔찍한 상상을 앞에 두고 한가하게 두려워할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아이가 찾아온 이후 나는 더 단단해진 것일까? 아주 조금은 그렇게 된 것 같다.
글. 한영인
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정일과 함께 쓴 비평 서간집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가는군요〉, 문학비평집 〈갈라지는 욕망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