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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7 스페셜

'빅이슈'가 꼽은 올해의 책, 영화, 배우, 음악

2019.12.21 | '빅이슈'가 꼽은 올해의 키워드 Part 1

연말이 되면 개인적인 올해의 ○○○를 꼽아보려 노력하지만, 좀처럼 잘 안 됩니다. 지난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데, 상반기에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에 위로받았으며 어떤 음악과 영화, 드라마를 즐겼는지는 더욱 생각이 나질 않죠. 12월이 마무리될 즈음 SNS에 개인의 어워드를 정리해보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도 부럽습니다. 나만의 어워드가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그저 여러 미디어들에서 뽑는 ‘올해의○○○’을 보며 기억을 떠올려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저물어버린 한 해의 사건 사고를 정리하는 것은 재미도 있지만, 곧 시작될 내일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이런 나였구나, 내년에는 어떤 내가 되어야겠다.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어’ 싶지만, 실은 우리는 한 해 동안 많은 일을 해냈고 매일의 시간을 통과해 오늘의 내가 되었으니까요. 잘했다, 열심히 살았다, 고생했다, 조금만 더 우리를 다독이고 칭찬해줍시다. 2019년 우리가 통과한 시간들을 정리한 '빅이슈'가 꼽은 올해의 ○○○을 시작합니다.


[올해의 책]
미래에서 온 동시대의 작가

2019년을 살아서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동시대의 책으로 접했다는 것이다. 나는 올해 몇 번이나 이 소설집으로 책 읽기 관련 강의, 혹은 강연을 진행했다. 어떤 때는 제목만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체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과 제목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단편의 줄거리를 간단히 들려주면 “책 제목이 뭐였죠?” 라는 질문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결말은 이야기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들 중 다수가 결말을 들춰보기 위해서라도 책을 대출하거나 구입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지금 가장 주목받는 장르를 꼽으라고 하면 출판계에서는 아무래도 SF를 꼽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포함한 영상물 쪽으로 오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한국 SF 영화나 드라마 제작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소심한 단계에 있다. 생각만 있고 행동은 전무한. 그런 의미에서 출판계는 놀랍게도 빠른 속도로 SF소설들을 펴내고 있다. <오늘의 SF>라는 SF전문 무크지도 창간되었다. 그리고 김초엽은 첫 소설집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공동수상했다. 가장 오랫동안 존재해온 미디어인 책이 향유자들을 가장 멀리까지 실어 보내고 있는 현장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어떤 작품을 먼저 읽으면 좋은지 묻는다면 <관내분실>을 추천하겠다.


김초엽, 그라서…

김초엽 작가는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2018년 중단편 부문에서 <관내분실>로 대상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가작을 동시에 받으며 데뷔했다. <관내분실>은 망자의 생애를 담은 데이터인 ‘마인드’가 보관된 도서관을 찾은 주인공 지민이 어머니의 마인드가 분실되었음을 알게 되며 시작된다. 관내분실은 도서관 내에서 분실된 열람물을 뜻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가 삭제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한 어려움만을 기억하는 지민은 임신을 한 참이고, 생전에 가깝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마인드를 복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강하게 느낀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관내분실>이 마음에 든다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좋아하게 되리라.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닿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장르를 불문하고 사랑과 그리움을 소재로 하는 많은 이야기의 공통점이 될 텐데, SF라는 장르는 거기에 빛보다 빨리 갈 수 있다 해도 가닿을 수 없는 거리를 부여하고, 수수께끼 같은 170살의 노인 안나가 우주 정류장에서 애틋한 썰을 풀게 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한편으로는 젊은 작가가 썼다고 생각하고 읽어서인지 그 모든 것이 낭만화되어 있지 않은가 동화를 읽을 때의 감정을 닮은 인상 생각되기도 하지만, 잠시 스치는 의구심과 무관하게 다 읽은 뒤에는 이 이야기와 같은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 꿈에서 우리는 상실한 것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얻고야 말 테니까.

그와 동시대를 살아서, 나는 다행이다

어쨌거나 나는 김초엽의 소설을 앞으로 오랫동안 읽을 작정이고 김초엽 작가가 부지런히 써주기를 바랄 수밖에! 어떤 이야기들을 읽고는 다음에 더 확장된 혹은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어 <감정의 물성>. 이 소설 속의 세계는 지금 여기와 몹시 닮아 있는데, 수상쩍은 물건이 인스타그램에서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얻으며 인기리에 팔려나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이 세계에서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물건이 판매되고 있는데 비누, 향초, 패치 등의 종류가 있으며, 온갖 감정이 이렇게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설렘, 편안함 같은 긍정적 속성이 강한 감정체뿐 아니라 증오, 분노를 포함한 부정적 감정 역시 잘 팔린다. 왜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마저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물성이란 실제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감정의 물성>의 결말은 갑작스럽지만, ‘더 나은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단 한 번의 것. 시험 삼는 것은 없다. 김초엽의 주인공들이
지닌 조심스러움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그러니 2019년에 살아서 좋은 이유는 어쩌면 김초엽의 첫 소설집을 동시대의 책으로 접했다는 것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다혜
<씨네21> 기자, 북칼럼니스트. 팟캐스트 <이다혜의 21세기 씨네픽스>,
오디오클립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진행. <출근길의 주문>,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튼, 스릴러> 등을 썼습니다.



[올해의 영화]
<기생충>의 한 해, 지하의 꿈틀대는 것에 주목하라

2019년 한국영화는 곧, <기생충>

“<기생충>이 받을 줄 알았는데…” 올해 청룡영화상 시상식의 유행어는 <기생충>이었다. <기생충> 열풍은 아마도 청룡영화상에 그치지 않고 각종 시상식과 연말 결산 자리의 단골 메뉴가 될 것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대중과 평단 양쪽의 지지를 받은 보기 드문 영화였다. 배급사의 의지와 힘을 실감한 케이스가 되긴 했지만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영화 최초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마침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했던지라 <기생충>의 위업은 마치 한국영화 전체의 홍복인 양 널리널리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어제까지 일면식도 없던 선배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의 끈질긴 저력이 오늘날의 봉준호를 만들었다고 상찬하고, 후배 영화인들은 제2의 봉준호를 꿈꾸며 각자의 각오를 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생충>은 하나의 신드롬을 거쳐 2010년대 한국영화를 거론할 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일종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요컨대 2019년 한국영화는 <기생충>, 이 세 글자로 정리되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기생충>의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그늘

개별의 호불호를 떠나 <기생충>은 그만한 존재감을 보여준 영화다. 하지만 2019년을 뒤돌아보며 좀 더 눈길을 보내고 싶은 방향은 <기생충>이라는 거대한 이름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영화들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누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건 누군가는 가려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반지하보다 더 아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때론 잘 드러나지 못하는 쪽에서 상황의 본질을 마주하기도 한다. 약간의 과장과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위기였다. 사실 언론과 평단에서 부르짖는 한국영화 위기론은 때 되면 찾아오는 돌림노래처럼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동시에 여러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산업적으로 성장이 멈춘 적이 없다.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전체 관객 수도 둔화될지언정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볼 만한 영화가 있는가’라는 매우 주관적이고 질적인 잣대로 접근한다면 작년만큼 위태로웠던 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여기서 ‘볼만한’의 기준은 단 하나, 감독이 기억이 나는 영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감독이 영화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색을 보여주는 영화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시장과 배급의 눈치를 보는 기획영화들이 고객의 눈에 잘 보이는 앞자리를 싹 쓸어간다. 그 결과 극장에는 영화가 넘쳐나지만 볼만한 영화는 줄어들어갔고, 독립영화 시장은 갈수록 쪼그라들어 어느새 1만 관객 동원이 목표가 되어버렸으며, 홍상수, 이창동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주름잡던 이른바 작가감독들도 서서히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게 딱 작년까지의 일이다. 사실 올해도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찬사와 안타까움 양쪽 모두의 심경으로, 이게 다 <기생충> 덕분이다. 한국영화 시스템의 체질이 2019년부터 단번에 개선되었는가. 극장에 갑자기 볼만한 ‘감독들의 영화’가 넘쳐나기 시작했는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기생충>의 개별적인 성공이 다른 모든 그림자를 가려주는, 편리하고 두려운 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영화인들이 바꾸는 세상

그 와중에 <기생충>만큼이나 화제가 된 독립영화 <벌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생충> 빼고 다른 영화가 모두 별로였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2019년 영화를 돌아보며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일은 독립영화의 약진이다. 물론 산업의 크기로는 여전히 미약하고 관객들의 관심과 수고로움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럼에도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중 상업영화가 여전히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나홍진에 매달리고 있을 때, 천만 영화가 줄줄이 나오면서도 이를 잇는 감독들의 이
름이 좀처럼 거론되지 않고 있을 때, 규모는 작지만 알찬 영화들이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이다. 올해 정식 개봉으로 관객들과 만난 <얼굴들>의 이강현 감독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풀어나갈 줄 아는 귀한 감독이다. <벌새>의 김보라, <보희와 녹양>의 안주영, <아워 바디>의 한가람, <메기>의 이옥섭,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 등 여성 감독들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다. 굳이 앞에 ‘여성’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흥미롭고 주목해야 할 이름들이다. 이들의 영화가 특히 이채로운 건 선배 세대들의 유산이나 영향을 이어받지 않고 스스로 결과물과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영화 100년이라고 하지만 실은 한국영화사의 핵심 키워드는 다름 아닌 단절이다. 전쟁부터 독재의 검열까지 시대마다 시기마다 크고 작은 부침을 겪어온 한국영화는 100년의 시간동안 빈번한 단절을 겪어왔다. 매 시기 위기론이 대두됐고 그때마다 이를 돌파해낸 건 선배 세대에게 빚지지 않은 젊은 영화인, 젊은 감독들의 에너지였다. 이들의 욕망은 명쾌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로서 자신이 보고 들은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하고 싶은 걸 한다. 이 단순한 명제가 모든 변화의 출발이다. 그 결과 1960년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긴 검열의 암흑기를 버틴 후 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가 밀어닥쳤고 빼어난 영화들이 관객들의 수준과 인식을 끌어올렸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도래로 극장 환경, 나아가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지금, 다시금 답을 내어놓는 건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이다. 물론 이들이 답을 내겠다, 영화판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한 야심으로 이 작업을 할 리는 없다. 그저 녹록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고픈 작업을 하겠다는 용기를 발
휘하는 것. 그걸로 영화는, 그리고 세상은 바뀐다.

목적보다 행위에 집중하는 영화들의 힘

그런 의미에서 올해 기억에 남는 작품은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다. 세간의 기준으로 이 영화는 실패한 영화다. 대중의 선택을 받지도 못했고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닌지라 영특한 감독의 그저 그런 차기작 정도로 낙인찍히고 사라져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무모함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원본 없는 세계에서 음모론의 미로를 탐닉한다. 그 행보는 혼란스럽고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거의 모든 순간이 과잉이지만 동시에 나는 이만큼 솔직한 영화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무기력을 표출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계에서 음모론으로 대변되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하고 있는 ‘행위’의 희열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세간의 평가나 무책임한 위기론과 무관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감독들은 언제나 존재했음을 <벌새>와 <얼굴들>로 대표되는 올해의 독립영화들을 통해 뒤늦게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2019년은 <기생충>이 아니라, 인식의 바깥에서 치열하게 매진했던 그들의 작업이 비로소 씨앗을 틔우기 시작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다만 이들과 만나려면 아직은 지하실로 걸어 내려가야 하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부디 당신도 조금만 더 발품을 팔아 자신만의 ‘올해의 영화’을 발굴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송경원

<씨네21>기자, 영화 평론가. 아는 만큼 말하고 말한 만큼 책임지려고 한다.
고양이 한 마리와 영화 평점에 까다로운 동거인과 함께 산다.


[올해의 배우]
이정은이라는 미스터리

*<기생충>, <눈이 부시게>, <동백꽃 필 무렵>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9년은 중년 여성 캐릭터의 호감과 가능성을 시험한 한 해였다. 조짐은 지난해부터 영화 <허스토리>, 드라마 과 같은 작품으로 조금씩 실체화되더니,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페미니즘의 화두가 한국 영화계를 노크한 올해엔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 서사와 캐릭터를 향한 관객의 소구력이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들에게 시대정신으로 공유되고, “좋은 역할이 없다”고 입을 모아 기회의 부족을 말하는 배우들에게 판을 깔아주는 업계의 선순환. 김희애가 <윤희에게>로 첫 퀴어 멜로드라마에 도전하고, 이영애가 <나를 찾아줘>로 오랜 공백에 아랑곳 않고 스릴러 장르의 주연으로 돌아왔으며, 라미란이 <걸캅스>로 여성 중심의 코미디를 통해 첫 주연작을 알렸다.

인고를 견뎌낸 생활

연기자들의 활약 스크린 주연작 사례가 지각변동을 알리는 비교적 쉽고 명확한 케이스라면, 이보다 더 궁금하고 절절한 사례들도 있다. 이정은, 김선영, 염혜란으로 요약되는 생활 연기의 달인들이 좋은 예시다. 이들처럼 기다렸다는 듯 참아온 에너지를 터뜨리는 사람들에게 역할의 비중은 자주 논외다. 저마다 오랜 가난을, 단역 생활을, 연극 무대에서의 인고를 뚫고 날아온 이들은 올해 쉬지 않고 우리 주변의 초상을 연기하며 장면 장면을 낚아챘다. 그중에서도 배우 이정은은, 2019년 내내 부지런한 다작과 빠짐없는 환호를 이끌어내며 아직 시작일 뿐인 황금기를 예고한 배우다.


새롭고도 압도적인 문광, 아니 이정은

지난 11월 21일, <기생충>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오랜 무명 활동의 스토리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배우 이정은. <기생충>에서 그녀가 연기한 문광은 작품 속 캐릭터의 궤적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그 집안 사정에는 도가 튼 부잣집 가사도우미인 그녀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쫓겨났다가 영화의 중반부쯤 갑자기 다시 등장한다. 딩동. 누군가와 함께 등장하거나 다른 이의 시점으로만 관찰되던 그녀가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그리고 가장 방심했던 순간에 홀로 나타나는 것이다. 비가 쏟아지는 저택 현관 앞에 검은 우비를 입고 선 여자. 더 이상 물러날 데 없이 애절하고 급한 문광의 상태는, 이미 영혼만 먼저 남편 근세가 있는 지하실로 날려 보낸 것 같은 표정 연기로 완성된다. 그 모습이 너무 기이한 나머지, 관객은 픽셀이 깨지는 작은 인터폰 화면만으로도 그녀가 이 영화에 도착한 저승사자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영화가 급회전을 시작하는 구간에 때맞춰 도착한, 장르의 안내자 문광 캐릭터에 새롭고 압도적인 배우를 기용하고 싶었을 감독의 바람이 만개하는 순간이다. 지하실 문을 열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벽에 붙어 있는 자태, 컴컴한 계단을 미친 사람처럼 단숨에 달음박질치는 움직임은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기초를 쌓아온 이정은이 얼마나 몸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쓰는 배우인지를 증명하기도 한다. ‘당신 대체 누구세요?’라고 묻고 싶은, 섬뜩한 그녀의 기운은 올해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이중적인 고시원 주인아줌마 캐릭터로도 변주되었다.

광기 어린, 그러나 무해한 엄마들

텔레비전 드라마의 쓰임새다운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할 때도 이정은은 호락호락한 법이 없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와 <동백꽃 필 무렵> 이야기다. 두 작품 모두에서 그녀는 얼마간 변주된 모성을 보여준다.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 김혜자, 한지민 의 엄마를 연기한 이정은은, 인물의 진솔한 성격 너머로, 관객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이중의 표현을 매 장면 성실히 던지고 있다. 눈 밝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정은의 얼굴에서 <눈이 부시게>를 감싸는 더욱 복잡한 감정의 층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무언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갸웃거릴 수 있었다.
<동백꽃 필 무렵>의 경우 이보다 과격하다. 딸 동백 역의 배우 공효진과 열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정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로 극의 미스터리를 극대화해야 하는 엄마 정숙에 더없는 적역이었다. 자주 텅 비어버리는 치매 환자인 동시에, 야생동물에 가까운 감각으로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동백의 주변 세계를 꿰뚫는 사람. 대단히 극적인 모순을 지닌 정숙 캐릭터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아우라였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이상하고, 무해하지만 어딘가 광기 어린 탓에 보는 이를 내심 긴장하게 만드는 능력. 모든 연기와 캐릭터에 미스터리를 내재화하는 배우 이정은은, 그렇게 신파 담당인 모성애마저도 가장 재미있는 무엇으로 만든다.

내공에서 우러나는 신스틸러

굳이 비유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많은 캐릭터를 <미성년>에서 주인공 대원 김윤석 을 곤란하게 하는 부둣가 만취 아주머니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저 사람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저러는지, 그리고 어쩌면 이토록 강력한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선명한 스토리와 문맥이 있는 경우에서도 이 마력은 식지 않는다. 역할이 크든 작든, 관객의 시선을 훔쳐가는 재주가 있다는 것은, 인과론적으로 말하면, 그녀가 오랫동안 신스틸러가 되기 위해 갈고닦은 배우라는 말이 된다. 짧은 분량과 사연 속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한 방’을 찾아야 했던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그 절박한 역사로부터 길어 올린 내공이 배우 이정은의 2019년을, 그 놀라운 흡입력과 존재감을 선물처럼 내밀었다.

김소미
영화 주간지 <씨네21> 기자. 순간을 발견하고 더 정확히 쓰기 위해 노력 중.


올해의 앨범 —
수림 <쉽고 확실하게>

솔직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

누군가는 다섯 곡 인트로를 제외하면 네 곡 에 불과해 가볍다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누군가는 낯선 이름과 앨범 커버 때문에, 누군가는 ‘그대가 죽은 날’과 같은 복잡한 곡부터 접하여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앨범이 나왔을 당시에 이야기하지 못해 아쉬웠을 만큼 이 작품은 복잡한 음악적 갈래를 품고 있으며, 그만큼 담고 있는 감정의 깊이도 크다. 어느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마음은 결국 음악을 들어야, 그리고 가사를 읽어야 알 수 있다. 듣는 사람들이 악기의 배치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하고 재즈와 포크, 전자음악의 오묘한 조합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사실 올해의 앨범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많다. 하지만 ‘그래서’와 같이 솔직한 내면을 보이며 음악가라는 정체성, 나아가 음악 자체에 관한 고민까지 이어가는 곡부터 ‘십자가’처럼 종교적 울림이 있는 시에 소리와 음계를 붙여 표현한 곡, ‘쉽고 확실하게’에서 들려주는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까지 비교적 짧은 호흡 안에 뮤지션의 큰마음을 내던진 작품은 찾기 드물다. 그래서 이 앨범을 올해의 앨범으로 꼽았다. 한 번 들어보는 것 말고 두, 세 번 정도 조용한 곳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들어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어느새 수림이라는 음악가를 통해 각자의 내면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림은 본명 정예은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자신의 이름을 건 7인조 밴드로 활동도 했으며 제26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는 팀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감성도 뚜렷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온 음악의 편성도 심상치 않다. 발표한 곡을 쭉 들어보면 스스로를 ‘재즈 꿈나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발표한 싱글 ‘강아지집’은 독특하게도 유튜브 채널인 유동방송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총동문회 방송 의 콘텐츠인 <고독한 작
곡가>라는 프로그램에서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주어진 주제로 곡을 완성하는 챌린지 형식의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만들어진 곡이 ‘강아지집’이다. 함께 들어보길 권한다.
수림의 앨범으로 올해 한국 음악 시장에서의 변화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마 차트 위주로 음악을 듣는 많은 사람은 크게 공감하지 않겠지만, 우선 좋은 음악을 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늘어났다. 다양한 장르 문법을 차용하는 대세 역시 꾸준히 생겨나고 있고, 여성 싱어송라이터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음악을 만든다. 여기에 수림을 포함해 유하, 유니니, 이설아, 다방 D’avant, 홍이삭 등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들이 점차 기량을 펼치고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6회 동상을 받았던 방시혁도, 4회 대상을 받았던 유희열도 어쨌든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으로 한국 음악 시장을 움직이고 있다. 케이팝과 차트에 있는 발라드곡도 좋지만, 그것만으로 2019년 연말 결산이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히려 각종 연말 결산을 통해 더 좋은 음악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밝은 음악, 희망찬 음악, 따뜻한 음악도 좋지만 내 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음악으로 차분하게 1년을 돌아보고 내년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이 음악을 추천한다. 어수선하고 들뜨기 쉬운 연말이지만, 그럴수록 차분하게 나 자신을 돌보는 것도 좋다.

블럭(박준우)
한국대중음악상, 온스테이지 선정위원을 한 바 있으며
해외 복수 매체에서 컨트리뷰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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