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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6 인터뷰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박효선 감독

2019.12.10 | 메릴 찾아 삼만 리

현재 나이 70세.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아니 지구상에서 연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꼽히는 배우 메릴 스트립을 만나러 미국에 갈 계획을 세운 사람이 있다.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박효선 감독은 2016년 트위터를 통해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고,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인 ‘찍는페미’를 만들었다. 그가 메릴 스트립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텀블벅을 통해 ‘본격 SNS 느와르 에세이’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펀딩을 열고, 동시대 페미니스트 영화인으로서 메릴 스트립과 대화하고자 하는 박효선 감독을 만났다.


영화 티저에서 ‘메릴 스트립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그를 주인공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메릴 스트립과 영화를 찍는 건 모든 감독의 꿈일 것이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로드 무비다. 메릴이 안 해본 연기가 없을 정도인데, 그중 열에 아홉은 백인 남성과 함께한 작품이고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였다. 제 세대 여성들이 보고 싶은 메릴 스트립의 모습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여성들과 다양하게 상호작용하는 이야기를 찍어보고 싶다.


메릴 스트립을 ‘파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영미권의 영화를 동경하면서 자란 사람으로서, 메릴 스트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라기 힘들었다. 영화에 막 관심을 가졌던 건 중학교 3학년 무렵이다. 그때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 를 보게 됐다. 머리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잘하는 연기를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메릴 스트립이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이상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 작품을 보고 영화와 연기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후 1년 반 동안 그 영화를 매일 보면서 모든 장면과 시선 처리, 뉘앙스를 외웠다. 그게 엄청난 공부가 되었다. 메릴 필모그래피를 다 파다 보니, 영화를 점점 좋아하게 됐다.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영화인으로서도 성장한 듯하다. 평소 영화인으로서 관심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
여자들은 개개별로 복잡한 존재다.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 <빅 리틀 라이즈> 2017 에선 여자들이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다가 결국 연대한다. ‘사이다’ 같은 이야기도 좋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에 더 끌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자들의 다양한 관계가 가시화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싸우더라도 ‘캣 파이트’로 단순하게 비유되고. 또, 항상 나이 많은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중노년 여성에 대한 관심 역시 메릴 스트립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생겨난 것인가.
제가 어릴 때 되고 싶어 했던 나이가 마흔이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대부분 그 나이 즈음이었다. 물론 이제 ‘멋짐’이 나이와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여성들이 쌓아온 역사가 드러나는 순간이 좋다.


메릴 스트립의 필모그래피를 재구성하고 분석한 글도 썼다.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 어려운 업계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한테 되게 많이 물어보신다.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웃음) 메릴 스트립이라는 이름은 이제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 이탈리아, 중국 등 각국의 배우에게 ‘당신은 OO의 메릴 스트립으로 불리지 않느냐’고 많은 언론이 묻는데,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배우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두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이 아닌 것 같다. 여성들이 맡을 수 있는 좋은 역할 자체가 너무 적다. 할리우드엔 ‘모든 좋은 영화 시나리오는 45세 이상부터 70세 사이 여성들 중 메릴 스트립에게 먼저 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러 매거진에서 다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비스타’ 같은 순위를 보면, 남자 배우 3~40명 중에 메릴 스트립 한 명 껴 있는 수준이다.


메릴 스트립이 한 연기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뽑는다면.
최근의 연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빅 리틀 라이즈>에서는 가정폭력범을 변호하는 연기를 한다. 미국인들이 그 연기를 보고 “살면서 메릴 스트립을 싫어하게 될 줄 몰랐다.”고 할 정도다.(웃음)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보았을 때 재밌는 것 같다. 또, 메릴 스트립이 눈치를 보는 연기를 잘한다. 그게 좋은 이유가, 여자들이 살면서 눈치를 많이 보지 않나. 여자들만 아는 표정을 정말 잘 표현한다. 그는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연기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데, 그런 게 느껴질 때 정말 감동적이다.

[ⓒRueters/News1]

SNS를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얻는 힘이 있을 것 같다. ‘찍는페미’를 만들었고, ‘#영화계_내_성폭력’ 운동을 통해 연대를 경험하지 않았나.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한 이후,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들이 이어졌다. 사회 각 분야에서 성폭력 고발이 터져 나오고, “이제는 우리가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면서 힘을 북돋운 것이 앞으로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정보봇의 프로필에 쓰인 ‘세상이 X같을 땐 그래 메릴을 보자’라는 문장이 재미있다. 힘들 때 메릴 스트립을 보면서 이겨내자는 의미일까. 조금 더 설명해준다면.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계정도 장난스럽게 만들었다. ‘메릴 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 같은 말만 봐도 그렇지 않나.(웃음) 첫 트윗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의 하얀 머리와 말투가 모두 계산된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남성 감독들의 말투를 관찰하고 기억해서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와 닿았던 것 같다.


이 영화 프로젝트가 ‘메릴을 통해 본 세상을 부수고 재정립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50대 후반 이후 메릴 스트립이 영화를 찍는 간격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40대가 된 후, 메릴은 자신이 영화계를 은퇴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다른 여성 배우들도 그랬으니까. 그의 2000년대가 정말 대단하다. <디 아워스> 200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6, <줄리 & 줄리아> 2009, <맘마미아> 2008 등을 찍은 게 거의 예순이 다 되었을 때였다. “30대 때보다 더 바쁘게 시나리오가 들어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정말 단지 천재 배우가 아니라, 늘 회자되는 ‘핫’한 배우가 된 것이 50대가 넘어서다. 훨씬 나이가 어린 여성들과 작업하기 시작한 것도 50대 후반이다. 그 전에도 최고의 평가를 받았지만 양상이 달라졌다. 그 때부터 소녀 팬들이 쫓아다니면서….(웃음) 되게 재밌다. 본인도 60대인데, 따라다니는 건 10, 20대라고 한다. 겨울에 자기 딸 같은 사람이 자기를 기다리니까 한국의 역조공처럼 핫초코 사주고.(웃음) 본인도 이걸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여러 갈래의 인권 운동을 하는데, 아티스트로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것이 그가 하는 가장 큰 운동이라고 본다.

이제 곧 메릴을 만나러 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장면들이 있을까. 여정을 어떻게 보여줄 생각인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도 궁금하다.
외딴 섬에 떨어지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제작자나 촬영감독 등 아시안 여성들도 취재하고 싶다. 제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니까,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하다. 한국에서 촬영한 분량은 홈 비디오 느낌이 많이 났는데, 미국에서 촬영할 부분들은 그런 장면과 대비되면 좋겠다. 촬영 팀 세 명이 모두 또래라, 친구들끼리 여행 가는 느낌도 날 것 같다. 그런 것도 생각하고 있다. 영화 속 맨해튼에 나왔던 장면, 그 거리에 가서 “여기가 메릴 스트립이 걸어가던 거긴데….” 하고. 생경한 느낌을 담고 싶다. 메릴을 만나는 과정의 고군분투도 담길 것 같다. 만약 메릴을 만나면 저희 셋은 정말 기절할 것 같다.(웃음) “우리가 만난 거 맞아?” 하는 얼빠진 모습도 재밌을 것 같고.


준비하는 과정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언론사나 제작사와 함께하면 연락이 좀 더 수월할 것 같긴 하다. 개인으로 해서 잘 안 받아주나 싶기도 하고.(웃음)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이고, 당신과 내가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요지의 영상으로 프로젝트를 소개해서 보냈는데, 매니저 입장에선 팬레터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텀블벅 펀딩을 하는 이유가 제작비 때문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지 알려주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메릴 스트립은 정말 많은 인터뷰와 연설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한 이야기 중 한국 여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
메릴 스트립은 “여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중 기억나는 건 “남의 조언을 듣지 말라.”는 것. 한국 여성들은 그런 말을 잘 못 듣고 사니까. 자기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그런 롤모델이 있다는 것이 힘이 된다.


마지막으로 메릴 스트립에게 한마디한다면?
일단 저를 만나줬으면 좋겠고.(웃음) 물론 이 영화는 만나는 게 최대 목표지만, 그를 인터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재밌는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건강했으면 좋겠다. 150년 정도 더 오래 해먹어줬으면.(웃음) 그는 7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만의 영화를 찍고 있다. 그가 가는 길은 역사가 되고 있다. 건재했으면 한다.

황소연
사진 김화경
장소제공 더홈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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