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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4 에세이

호모 비틀즈 비틀즈와 호모 신림쿠스

2019.11.12 | 내 친구가 사는 신림동에 갔다

내 친구가 사는
신림동에 갔다

골라 먹는 네 가지 과일맛! 저는 비틀즈를 좋아해요. 아, 원래는 록 밴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지. 다시, 저는 비틀즈를 좋아합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밴드의 구성원들이 영국 리버풀 출신의 '동네 친구들'이라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저도 동네 친구 몇 명과 함께 < Yesterday > 나 < Hey Jude > 의 가사를 외우곤 했지만, 우리는 음악 수행평가조차 어렵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쨌든 저는 어릴 때부터 비틀즈를 들었는데, 그때그때 좋아하는 사탕 맛을 골라 먹는 것처럼, 성장 시기별로 좋아하는 멤버도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코가 큰 링고 스타가 드럼 치는 게 그냥 멋있어 보였고, 한창 아이돌 붐이 일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인기 많고 잘생긴 개구쟁이 이미지에 감정이입을 했었는지 폴 메카트니를 좋아했지요. 사춘기를 겪을 즈음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존 레논을, 최근에는 엄청 긴 러닝타임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조지 해리슨을 제일로 꼽습니다. 이렇게 비틀즈 멤버들은 각각 혹은 모두가 그때그때마다 제게 커다란 거울이 되어줍니다. 경민이를 처음 만난 날에도 이렇게 뜬금없이, 싱거운 농담과 함께, 저를 호모 비틀즈 비틀즈라고 소개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경민이를 소개해줬습니다. 몇몇 개의 커피 약속을 하루에 몰아 해결하려는, 그 친구의 치밀한 계획 덕분에 우리는 우연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주제로 경민이와 이야기하는 건, 여름 바다에 뛰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에서 헤엄치며 시간을 보냈지요. 그 후로도,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나누면서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최근에 저는 그녀의 삶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영화관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어떤 영화를 봤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나, 이 동네에서 7년 동안 살았다."는 말은 또렷합니다. 제주도에서 온 젊은이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신림이라는 동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경민은 스무 살 때 재수를 결심하고, 제주도를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고 했습니다. 이미 상경하여 신림동에 자리 잡고 있던 친오빠와 같이 살기 위해 찾아간 게 그 동네와의 첫 만남이었죠. 지역을 제멋대로 구분해보자면, 신림을 지하철역이 있는 큰 사거리를 기준으로 하여 네 개의 동네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경민은 그 모든 동네에서 다 살아봤다고 했습니다. 동남쪽인 '서울대 입구 방면'에서 1년, 서남쪽인 '대학동/서원동'에서 2년, 서북쪽인 '신대방 방면'에서 2년, 그리고 동북쪽인 '봉천동 방면'에서 2년째, 우리는 그녀가 떠올리는 추억의 구석구석을 걸었습니다.

첫 느낌은 경민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 비공개 다이어리를 클릭한 것 같았습니다. 동남쪽 '서울대 입구 방면'에서의 재수 생활 이야기는, 일단 경민이가 말할 때 프라이머리의 <독>Feat. E Sens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기도 했거니와, 무척 아련했기 때문입니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서인지 과잠을 입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나도 제때 들어갔으면, 지금 과잠 입고 학교에 가고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재수 학원에서의 수업이 모두 끝나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일부러 길을 돌아갔다고도 하니, 처음부터 동네에 정을 붙인 건 아니었던 것이지요.

지독했던 재수 생활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 경민은 대학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악덕 부동산에 잘못 걸려 대학동 중에서도 완전 산꼭대기 집에 올라가서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제가 직접 가봤는데 칭기즈 칸도 아마 그 오르막 앞에서는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매일매일이 만원 버스로 시작해서 지옥철로 마무리 하는 출퇴근길의 연속이었는데, 그런 대학동에서 집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근처에 가성비 좋은 맛집이 많았기 때문'이랍니다.

서북쪽의 '신대방 방면'은 다행히 평지였으나, 경민은 이때를 "몸은 편해졌지만, 자기 자신과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신림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도림천에 가서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면서 마음가짐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고 추억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경민이가 동북쪽인 '봉천동 방면'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지금, 신림역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경민이가 그동안 살았던 동네들을 돌아다니며, 그때 그 시절의 음악을 듣고,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대학동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도림천을 따라 걸었습니다. 문득 경민이라는 사람과, 경민이 살았던 동네들, 그리고 그곳에서의 에피소드들이 각각 혹은 모두가 서로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인생을 바둑에, 또 다른 누군가는 인생을 비틀즈에 비유한다면, 경민의 20대는 신림이라는 동네에 빗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글·사진 조은식
소개말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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