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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6 에세이

만화 찢어주는 남자

2019.07.26 |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영화 <리틀포레스트 사계절> 스틸

약속이 없는 주말, 오늘의 가장 큰 행사는 단연 ‘저녁 메뉴 정하기’다. 반쯤 감긴 눈과 부스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오늘의 메뉴를 머릿속으로 하나둘 넘겨본다. 김치찌개는 이제 조금 지겨워지려 하고, 함박스테이크는 금요일 점심 에 먹었고, 비프타코는 단골 타케리아의 셰프만큼 맛있게 만들 자신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자니, 내가 무슨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오는 실력 좋은 셰프라도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인터넷에 몇 자만 쳐보면 사진과 영상으로 각종 요리법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다 머릿속 메뉴가 바닥을 드러내면, 그제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는다. 우선 검색 결과 가장 상 단에 뜨는 백종원 사장님의 JMT 레시피들은 일단 거르고 본다. 뭐랄까? 굳이 큰길가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지나 쳐서 골목 안쪽의 맛집을 물어물어 찾아가는 감성이랄까?

주말의 저녁 식사는 평일의 메뉴보다 조금 더 소박하고 개성 있는 맛이면 좋을 테니까. 그러다 뻔하지 않지만, 품도 덜 들고 맛까지 좋을것 같은 메뉴 하나를 정한다. 대충 차려 먹은 아침 겸 점심 식사가 끝나갈 때쯤엔 이미 ‘오늘의 저녁 메뉴 레시피’와 ‘장보기 리스트’가 완성돼 있다.

-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일본 만화. 일본에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임순례 감독, 김태리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했다. 2002년 12월 부터 2005년 7월까지 고단샤의 월간에 연재했으며, 대자연에 둘러싸인 코모리라는 일본 도호쿠의 작은 마을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주인공 이치코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 단행본 2권 완결. -

설거지를 서둘러 끝낸 후, 장바구니를 들고 근처 대형 마트로 달려간다. 오늘의 장보기에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 하 나가 있다. 잘 손질해서 먹기 좋게 나온 식재료보다는 되도록 농부의 손에서 막 떠난 날것 그대로의 식재료를 구매 하는 것. 요즘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칼질도 필요 없이 불에 올려 조리만 하면 되는 반조리 식품이 인기라지만 기본적으로 손질, 조리, 설거지의 3단계가 요리의 필요조건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식재료를 구해 집으로 돌아오면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다.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고, 감자에 묻은 흙을 닦아내고, 부추 더미 속 시들어버린 줄기를 솎아내는 일. 숙련된 전문가라면 한칼에 끝냈을 과정이 나같은 미숙련 요리사에겐 한나절은 잡아먹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자기 자신의 몸으로 말야, 직접 체험해보고, 그중에서 자신 이 느낀 것과 생각한 것.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잖아? 그런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을 존경 해. 신용도 하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척이나 하는, 타인이 만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 기만 하는 인간일수록 잘난 척만 하지.”

- 1권, 124~125쪽


분에 넘치는 나의 주말 한 끼 프로젝트는 그저 <리틀 포레스트>의 이치코를 흉내 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에게 요리란 파종, 관리, 수확, 손질, 조리, 설거지의 여섯 단계를 거치는, 차원이 다른 지난한 과정이다. 사계절 내내 농작물을 논과 밭에 심고, 돌보고, 수확해서 각자의 성격에 맞는 세심한 조리법으로 요리하면, 식당에서나 볼법한 가지각색의 메뉴들이 어느새 뚝딱 만들어져 나온다. 수유나무 열매를 씻고 짓이겨서 씨와 과육을 분리하고, 설탕과 함께 몇 시간 졸여 잼을 만들고, 냉장고에 차갑게 식혀뒀다가 다음 날 아침 직접 만든 빵 위에 발라 먹는 것처럼 말이다. 이치코는 이 모든 과정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급자족, 혼자만의 힘으로 씩씩하게 해낸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도시 생활자에게 자급자족에 대한 로망이라니. 인류가 분업을 통해 이뤄놓은 성장과 진보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적당한 가격으로 주문한 간편한 배달 음식이나 솜씨 좋은 식당의 요리를 사먹는 편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효율적인 일일 테다. 그렇게 알뜰살뜰 저축한 시간으로 여름 바캉스 상품 기획 안을 구상하거나, 새로 오픈한 골프 코스에서 사업 파트너와 라운딩을 갖거나, 글로벌 주가의 거시적 흐름을 분석하는 편이 몇 배 더 생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지 못 한다. 그렇게 아껴둔 시간으로 아마 밀린 미드를 챙겨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흘러간 밴드의 숨은 명곡을 발굴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사계절> 스틸

친구들과 마실 막걸리를 손수 빚고, 가죽을 두드려 가방을 만들고, 대팻밥을 먹으며 아이의 책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비효율에 기꺼이 시간을 쏟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닌걸 보면, 무엇이 더 효율적이고 비효율적인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겠다는 방향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금융 부자들이 돈을 낭비하며 만족감을 얻는 것처럼, 시간 부자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취향에 시간을 낭비하며 만족감을 얻는다. “시간은 금이라잖아요. 나는 지금 황금보다 귀한 시간을 주말 한 끼에 전부 쏟아붓고 있습니다.”

어느 드라마 속 한량 캐릭터가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처럼 세상의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을 기억한다. 종일의 노동으로 겨우 늦은 저녁 한 끼를 얻어먹는 일 역시 비효율적이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이유 없이 밀려왔다 이유 없이 밀려가는 파도,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굽어진 산길, 매번 실패하면서도 다시 한번 달려드는 연애 감정처럼 이 세상엔 온통 몹시도 비효율적이고 몹시도 아름다운 것투성이다.

Writer 권진호

Editor 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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