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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8A 컬쳐

사소하게 연연하는 - 내 마음속 빛을 비춰주는 기억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

2024.10.30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 스틸 (©간사이 테레비, MMJ)

글. 박현주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역행성 기억상실은 한국 드라마에 너무 맥락 없이 등장해서 K-드라마적 요소로 웃음을 사지만, 실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소재이다. 기억이 없는 남편을 찾아 떠나는 〈해바라기〉나 〈마음의 행로〉 같은 고전영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본 아이덴티티〉나 〈메멘토〉 같은 스릴러 영화도 대중의 인기와 평론가의 호평을 얻었으며, 한국에서는 〈환상의 커플〉, 〈겨울연가〉, 〈백일의 낭군님〉, 〈원 더 우먼〉 등 기억을 잃은 주인공들이 등장한 드라마들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았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서는 기억상실증은 꼬박꼬박 등장하고, 주요 인물이 골고루 돌아가며 기억을 잃기도 한다.

기억상실 설정이 이처럼 만능열쇠처럼 사용되는 이유는 기억의 공백이 만들어내는 결손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을 쓰면 사건의 범인이나 중요 물건의 소재 등 비밀을 자연스럽게 감출 수 있고, 인간관계를 얽히고설키게 만들어 애틋한 감정을 자아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기억상실은 자기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깊이 탐구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한 인간은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신체의 동일성이 반드시 한 인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즉, 과거의 내 삶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는 여전히 나인가? 라는 정체의 혼란이 기억상실이라는 주제에 반드시 따라온다. 그리고 내가 과거의 내가 아니라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고민이 뒤따른다.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11부작, 국내에서는 왓챠, 웨이브, 티빙에서 시청 가능)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또 하나의 기억상실 드라마이다. 흔한 소재를 썼지만 〈언멧〉은 기억을 잃은 카와우치 미야비(스키사키 하나)가 환자인 동시에 의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만화 원작은 각종 뇌의과 질환을 신의 솜씨로 치료하는 천재 괴짜 의사 산페이 토모하루(와카바 류야)의 활약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지만, 드라마는 매일 잠에서 깨면 이전 날의 기억이 없는 증상을 겪는 의사 미야비의 혼란과 극복에 초점을 둔다. 각 환자들의 에피소드는 동일하지만, 드라마는 기억상실 의사로서 환자를 대해야 하고 자신을 찾아야 하는 미야비의 내적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멜로드라마적인 깊이가 더해졌다.

큐료 센트럴 병원의 뇌외과의로 근무하는 미야비는 1년 반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이전 6개월을 포함해서 2년간의 기억을 잃었고, 매일 기억이 리셋되는 장애를 앓고 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잠들기 전 일기에 적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일기를 읽어서 일상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항상 자기를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아직 근무하고 있으나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간호조무사와 다를 바 없어 의사로서 자괴감을 느끼는 미야비.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미국의 대형 대학병원에서 일했던 뇌외과의 산페이가 나타난다. 산페이는 미야비가 뇌외과의로 더 많은 역할을 하도록 밀어붙이고, 산페이의 명령 같은 요청에 미야비는 위축되지만, 자신을 깨는 도전을 하면서 외과의로서 자신감을 차츰 찾아간다. 미야비의 주치의이자 간토 의대 병원 뇌의과의 교수인 오오사코 코이치(이우라 아라타)는 제멋대로인 산페이가 미야비를 지나치게 흔들어놓을까 경계하지만, 산페이는 미야비의 뇌를 진찰해보고 싶다는 말을 대담하게 꺼낸다. 놀라고 당황해하는 미야비에게 산페이는 일기에는 적지 말라고 부탁하며 미야비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 스틸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에서부터

〈언멧〉은 약간의 미스터리 요소가 가미되었지만 휴먼 의학 드라마로서 충실히 구성되었다. 미스터리적 요소는 미야비가 당한 사고의 진실, 그녀의 기억을 계속 봉인하기를 바라는 음모와 관련된 사건이다. 의학 드라마적인 면에서는 만화에서 가져온 전문적인 에피소드를 그대로 살렸다. 뇌경색, 실어증, 왼쪽 편측 무시, 모야모야병 등 뇌 기능 이상과 관련된 질환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과 그로부터 구해주려는 의사들의 노력이 성실하게 그려진다. 여러 질환 중에서도 뇌 질환은 치사율도 높지만 대부분 후유증이 남아 꾸준한 재활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뇌 손상을 입은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전과 같이 기능하지 못하는 나를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줄까? 똑같은 고통을 겪는 미야비는 환자들의 심적인 괴로움에 공감하며 의사인 자신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 배우의 연기가 빛난다. 매일 기억을 새롭게 써야 하는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는 미야비는 스기사키 하나가 특유의 차분한 연기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언뜻 보기에는 속을 알 수 없는 산페이는 냉철한 판단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이 공존하는 인물인데, 와카바 류야가 독특한 연기 톤으로 살려냈다. 특히 서로 아픔을 위로한 후에 다시 새로운 아픔을 직면하는 9화 엔딩에서의 두 사람 연기의 호흡은 전율이 일 정도다.

매일 일기를 써야 주변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고, 일기에 적혀 있지 않다면 3일 연속 같은 점심 메뉴를 먹어도 알 수 없는 미야비는 산페이를 만나 마음의 기억에 대해서 질문한다. 기억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진 것인지, 혹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인지. 감정은 기억이 없이는 흐르지 않는 것인지. 미야비의 캄캄한 머릿속을 한 줄기 빛과 같은 기억의 실타래를 잡고 걸어가다 보면, 거기에는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던 커다란 사랑이 기다린다. 〈언멧〉은 결국 기억의 한계를 넘는 순애보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근에 일본에서도 기억상실에 관한 작품이 꽤 많아졌다는 인상이다. 한국에서도 반향이 있었던 〈오늘 밤, 이 세계에서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같은 도서 원작 영화나 넷플릭스에서 방송된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첫사랑에 대한 영화였다. 기억의 손상에도 상실되지 않는 사랑은 아름다운 소재이지만, 사랑의 운명적 절대성을 설파하는 데 머무르면 감정적 퇴행이 될 수도 있다. 〈언멧〉 또한 기억과 사랑에 관한 드라마지만, 결국 여기에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서부터 이어온 존재임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혹은 그런 나를 기억해주는 타인이 있기에. 시간은 깔끔하게 배열된 일직선이 아니라 광활한 들판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사건의 모음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선으로 정리해 역사를 만드는 건 바로 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공유하는 타인의 노력이다.

〈언멧〉을 보면 또한 나의 시간에 관해서도 사유하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고를 당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매일 조금씩 기억을 잃어갈 것이다. 무사히 나이가 들어간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기억을 더하는 것보다 하루에 더 많은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이 들 때 〈언멧〉의 대사를 떠올린다. “빛이란 건 여기, 자기 안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둠도 밝게 보일 테니까.” 그 빛이 꺼질 때까지는 나는 나를 지켜가며 살 것이다. 이 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언멧: 어느 뇌외과의의 일기〉 스틸 (©간사이 테레비, MMJ)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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