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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0 에세이

서울 동네 - 침묵만이 만들 수 있는 언어들 "카페 침묵"

2024.05.16

엄마는 항상 말했다. 말을 아끼라고. 말 대신, 생각할 시간을 늘리라고. 나는 그 말에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말을 해야 내 생각과 마음이 형태를 가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에게 ‘침묵’은 지루함이었고, 때로는 표현을 등한시한 고집스러움의 결과였다.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

차가 닿지 않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작고 후미진 골목길. 그 안쪽에 새로운 가게가 들어올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도보로 채 2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산책을 하면서도 잘 지나가지 않던 틈새의 길. 짙은 녹색 문에 우드 바닥으로 된 인테리어를 보니 아무래도 카페 같았다. 대로변과 다르게 여기는 유동 인구보다 유동 길고양이가 더 많을 터였다. 여기에 카페가? 이 미스테리한 위치를 선택한 주인장의 의도에 자꾸만 호기심이 갔다.
‘이곳은 대화 금지 카페입니다’ 카페 침묵. 이곳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정식 오픈 며칠 후, 출입문 바깥 입구에 걸린 종이 안내판에서였다. ‘카페’와 ‘침묵’이라는 단어의 결합이 영 낯설었지만, 어찌 보면 그 둘은 꽤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내심 궁금했지만 좀처럼 갈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문을 여는 데다가 오후 1시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내 일정은 비교적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한가했던 터라 영 시간대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날
그날은 유난히 말과, 글과, 생각과, 감정이 넘치던 날이었다. 회사는 분주했고, 꽉 묶인 매듭 같은 일들을 풀어야 하는 상황. 잠깐이라도 어딘가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고립되면서도, 쉽게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의 은신처. 카페 침묵의 짙은 녹색 문이 떠올랐다. 동료들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타박타박 100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그곳에 도착했다.
카페 침묵 전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짙은 녹색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가니 단정한 실내가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왔다. 여섯 개의 1~2인용 테이블, 바와 나란히 있는 오디오와 스피커, 그리고 2면을 빼곡히 채운 클래식 CD들. 들리는 소리라고는 잔잔하게 흐르던 쇼팽의 음악뿐이었다. ‘어서오세요’ 같은 흔한 인사는 없었지만 대기 중에 가득 차 있는 평온한 클래식 선율과, ‘벽돌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는 손님과, 조용히 눈을 마주치던 주인의 모습은 분명 ‘환대’의 또 다른 언어였다.
처음에는 말을 금지 당하는(!) 낯선 방식에 조금 어색했지만 그 전제에는 금세 적응이 되었다. 원래 음성 언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난 구석 자리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무용(無用)’의 시간을 보냈다. 노트북도, 읽을 책도, 아무것도 없이 오도카니 테이블에 앉아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나온 핸드드립 커피를 이따금 마실 뿐이었다. 언어가 지워지니 다른 감각들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커피를 와인처럼 도르르 굴리며 입안 가득 차는 그윽한 맛과 향에 잠깐 황홀해했다가, 고음악들이 주는 원초적인 중저음의 선율에 쑥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건물 뒤편 뷰(!)인 통창에서 길고양이가 파이프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놀고 있는 것을 하염없이 관찰하기도 했다.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익명성의 안온함. 적당히 낮은 실내 조도와,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을 가느다란 골목길 위의 좌표까지, 도망치고 싶은 날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곳은 없었다.
카페 침묵에서 대화 없이 어떤 방식으로 주문이 이루어지는지, 말을 하지 않는 카페라는 정체성이 왜 생기게 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하나하나가 카페 침묵을 경험하는 즐거움이자, 일종의 태도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일상의 스포일러들이 각각의 고유한 경험들을 얼마나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지 알기에 누군가는 또 그만의 방식으로 침묵과 그 공기를 만끽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뭐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 몇 번만 검색해도 다 나오겠지만.
이후에도 내 입맛에 딱 맞는 리브레 원두의 핸드드립이 먹고 싶을 때, 아무 말 없이 클래식 음악의 여백을 즐기고 싶을 때, 사놓고 펼쳐보지 못한 책의 첫 장을 열고 싶을 때 카페 침묵을 찾았다. 엄마 말이 맞았다. 말은 하면 할수록 텅 빈 느낌이 드는데, 침묵은 하면 할수록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 안을 꽉 채우는 듯했다. 특히 바쁜 일상 속에서 미처 찬찬히 들여다보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은 깊은 침묵의 순간이 이어질 때 비로소 또렷해지고 그다음 단계로 확장되었다. 며칠 전 일요일도 그런 날이었다.

외면했던 감정을 찬찬히 풀어내고 싶은 날
지난 3월 31일. 그날은 홍대역 근처에서 열린 <반짝다큐페스티발>의 폐막일이었다. 여러 독립 다큐멘터리도 시선을 끌었지만 내가 기대하고 있던 건 폐막작 상영 전에 열리는 포럼이었다. 주제는 ‘참사의 서사는 어떻게 확장하는가’.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미디어팀 구성원들이 패널로 나와 대담을 하는 방식이었다. 몇 번의 참사에 관한 불안정하고 축축하고 욱신거리는 내 마음들. 이건 오랫동안 밀어놓고 외면한 게으른 감정이었다. 어느새 10주기가 돼버린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 아직도 진행형이 분명한 이 참사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활동가의 입장, 창작자의 입장, 목격자의 입장, 동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의 입장 등 다양한 관점이 오가며 포럼은 생기를 띠었다. 하지만 ‘재난이 반복되면 풍경이 되어버린다.’는 말에 나는 또다시 마음이 덜컥했다. 쉽게 휘발되지 않는 이 눅눅하고 초라한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슬픔이나 죄책감 같은 단어로는 온전치 않았다. 더 알고 싶은 마음과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안에서 옥신각신했다. 축 가라앉은 마음을 안고 포럼이 열렸던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부터 북아현동 회사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어쩐지 회사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짙은 녹색 문을 또 밀고 들어갔다.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침묵이 약속된 그곳.
일요일 저녁 7시가 넘어선 시간이라 손님은 나뿐이었다. 자리에 앉아 헝클어진 마음의 가닥들을 하나하나 풀어 기록했다. 그 참사를 목격한 내가 가지는 당사자성. 그 주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사회안전망이 맥없이 허물어진 것에 관해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엄중히 벌해야 하는가. 저 멀리 밀어놨던 생각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침묵 안에서 비로소 생기는 새로운 언어들. 내 안은 사나웠지만 천상의 소리 같은 클래식 음악만이 태연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주인장은 바 너머에서 자기만의 독서에 열중하고 있고 아직 따뜻한 커피가 반이나 남아 있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순간. 나는 침묵이 만들어낸 그날의 언어들을 어제도, 오늘도 생각한다. 내일도 아마 생각할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날, 외면했던 것들을 찬찬히 풀어내고 싶은 날, 나는 평소 친하지 않던 침묵을 데리고 무거운 녹색 문을 연다. 물론 어디서든 침묵할 수 있으나 외부의 스위치를 끄고 들어가는 나만의 은신처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은가. 어떤 날은 침묵만이 만들 수 있는 언어들을 쭉 늘어놓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의 후미진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사실 대부분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은신처.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결국 반짝이는 것들에 관해 꾹꾹 눌러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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