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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2 에세이

내가 되어가는 중 (1)

2023.02.05


“그것은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소리를 찾아낸 기분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떨어져나간 줄도 몰랐던 목소리의 한 귀퉁이를 주운 느낌이기도 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여겨질 만큼 힘이 들면서도, 다음에 또 이 모든 과정을 다시 겪는다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너무 특이하지도 지나치게 평범하지도 않게, 내가 되어가는 중이다.”


ⓒ unsplash

대학생 때 학교 취업상담센터에서 MBTI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검사 결과를 두고 상담 선생님과 나눈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학생은 정말 생각이 깊고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네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깊다 보니 너무 조심하게 되는 거예요.
100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그중 겨우 한두 가지를 해보는 스타일?

진짜 최악이네요.”

그게 그렇게 나쁘기만 아니에요. 100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이 훌륭한 아닌가요?

훌륭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객사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나는 객사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곱게 가고 싶다. 죽음이란 것 자체가 별로 곱지 않은데 구태여 험하게 맞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사춘기 내내 품었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어느새 슬쩍 내려놓았던 이유도 상당 부분 그래서였다. 내가 듣게 되는 작가들의 삶이란 감당이 안 될 만큼 특별하고 특이했다. 그 범상치 않음은 국적도 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이든 미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그가 글깨나 쓰는 사람이라면 어마어마하게 술을 많이 마시곤 했다. (나는 맥주 한 잔으로도 피가 흐르는 듯이 얼굴이 새빨개지는 사람이다) 그들은 대부분 가정사가 평탄치 않았다. (내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현부양부?) 평생 연애만 하다가 외롭게 가거나, 치사량만큼 결혼을 많이 하다 외롭게 갔다. 고등학교 때 그런 유명 작가들의 삶을 모아놓은 책자를 보다가 몸서리를 쳤다. 그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그 대신에 그 사람들은 구국 영웅이 되기도 하고 일생일대의 작품으로 인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았는가. 나는 그 정도로 특이하게 살면서 삶을 작품의 땔감으로 쓸 그릇이 못 된다는 게 포인트다.

ⓒ unsplash

그런데 또 아주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기에는 이런저런 잡생각이 심히 넘치는 인간이다. 이런 걸 해보면 어떨까? 저런 건 또 어떨까? 어릴 때부터 책상머리에 앉아 온갖 공상을 펼치느라 멍하니 있다 보면, 엄마가 “너 뭐 하니?” 하시곤 했다. 며칠 전, “아빠는 왜 가만히 앉아 있어?” 하는 혀짧은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니 두 살배기 재이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내가 또 그렇게 멍하게 있었나 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아니, 나는 사람이 노력으로 충분히 환골탈태가 가능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도저히 바뀌지 않는 인장과 같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아주 가끔씩만, 특이한 도전을 해보는 식으로 삶을 이어왔다. 그 결과 배우들만큼 다이내믹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 흔하다고도 할 수 없는 ‘성우’의 삶을 살게 되었나 보다.

성우협회에 소속된 성우는 한 직업의 종사자 수라고 보기에는 극소수다. 나야 이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성우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힘들지만, 바깥에서 성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종종 미용실 같은 데를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슨 일 하세요?” 하는 질문을 받아 ‘성우’라고 답하면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고라니나 청둥오리 같은 천연기념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창피하다거나 자랑스럽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망생과 신인 시절을 지나며 선배들에게 성우 일이 사라져간다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일정이 바쁘든 한가하든 늘 왠지 모르게 멸종되어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멸종되더라도 내가 창피하거나 자랑스러울 일은 아니지만.

아마 고라니와 청둥오리도 멸종보다는 끼니를 걱정할 것이다. 나는 끼니만큼 꿈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꿈이 뭐냐는 질문이 서서히 멸종되어간다. 주변에서도 묻지 않고 나도 잊는다. 쉽사리 꿈을 이루지 못하고 버둥거린 아내 덕분에 나는 10년 넘게 천연기념물로, 아니 성우로 살면서 그 단어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성우로 10년 차를 앞둔 시점에 그런 질문을 던져준 고마운 사람도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런 답을 할 줄 몰랐다.

이 글은 '내가 되어가는 중 (2)'로 이어집니다.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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