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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0 에세이

재개발 현장에서 마주하는 살아짐의 순간들

2022.08.12

‘방림’, 두 글자에서 찾은 사라진 시장

서울 방배동에 처음 발걸음하게 된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말만 남아 떠도는 이름 때문이었다. 정확히 실체는 없는데 간판에 적힌 두 글자, ‘방림’이 괜히 신경 쓰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중요한 흔적인 것 같아 기억해두었다. 며칠 후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이 두 글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무엇인가의 흔적일 것 같다는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과거에 있었던 시장 이름이 방림이었다. 많은 사람이 알 만큼 유명하고 특별한 장소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을 곳이었다.

눈앞에 있던 장소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곳에 쌓인 경험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별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남는 것도 아니다. 존재 여부는 가치를 넘어선 상황과 맥락에 의해 남겨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특정 장소에서 쌓인 경험과 기억이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를 기반으로 어떤 의미를 남길지 기준을 만들고, 어떠한 가치를 만들어낼지 지속적으로 지켜보면서 더 나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역할이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특수한 경우도 생긴다. 이러한 유동성을 고려해 필수적 의무가 아닌 선택적 제안으로 방향성을 고려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빈틈은 비공식 기록의 가치와 역할을 재고할 여지를 제공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별것 아닌 순간들을 드러낼 기회가 생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던 방림이라는 두 글자는 나에게 발견되면서 존재가 확인되었고, 시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방배동의 시간과 함께하고 있다.

방배동13구역, 사라질 시간들

방배동을 둘러보며 사라진 방림은 시작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동네 구석구석에서 재개발사업을 추진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2019년 여름 무렵이었다. 일부는 재개발사업이 확정되어 주민들이 이주를 마친 상태였고, 일부는 추진 중이어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워낙 사업 범위가 넓고 기세가 심상치 않아 계속 지켜보았는데, 2022년이 되자 재개발사업은 빠르게 추진되었다. 마침내 다른 구역도 이주를 시작했다. 방배동은 1970~80년대 강남 개발 당시 같이 개발되어 주거 단지가 형성된 곳으로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 3층 높이의 다세대 빌라가 많았다. 가파른 언덕과 계단을 올라야 했지만, 건물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단독주택의 경우 집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정원이 있고, 집을 짓는 데 쓰인 건축물의 재료도 다양했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정원의 식물은 재개발구역의 황량한 풍경을 한껏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빽빽하게 골목을 채운 건물들을 보면서 새로운 동네를 만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건물을 세워야 하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매일 지나다니던 길 위에는 물건들이 버려졌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풍경 사이에서 방황하며 쓸모를 발견한다. 그렇게 재개발 현장에서 살아짐의 순간을 발견하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 머물렀던 많은 것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글 | 사진.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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