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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8 에세이

등산화, 봄이왔다

2021.04.28 | 사물과 사람

지하철 4호선 산본 역사 안에는 뉴코아아울렛이 있다. 전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가려면 아울렛의 할인 행사장을 지나치게 된다. 내가 가진 옷의 절반은 거기서 산 것 같다. 거기에는 옷값의 심리적 상한선 2만 9천 원을 넘지 않는 옷들이 많았다. 다닥다닥 줄지어 걸린 옷들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Y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다가가서 아는 체를 했다. “언니도 여기서 옷 사세요?” “아, 안녕. 여기 너무 좋지.” Y 선배와는 30년쯤 전에 대학원에서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성당에 다니고,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섯 살 나이 차이도 그렇거니와, 살갑지 않은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몇 장면도 따지고 보면 선배가 초대한 것이었다.

뒷산
“역 앞 극장에서 <밀양>을 하던데, 같이 보지 않을래?” 저녁에 문자가 왔다. 심야 상영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 끝났는데, 차마 그냥 헤어질 수가 없었다. 술집이었는지 찻집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마주 앉아서 줄곧 담배를 피웠던 것은 기억난다. 선배도 나도 평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건 영화 탓을 해야 한다. 아무튼 선배와 나는 그렇게 가끔, 느닷없이, 깊이 만났다.

그 선배가 암에 걸렸다. 참고 견디는 사람들이 암에 걸린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어느 일요일 저녁에 동네 찻집에서 만났다. 많이 여위어서 팔도 다리도 더 길어 보였다. 두건을 쓴 얼굴에 눈은 맑고 깊어져서 꼭 수도승 같았다. 헤어지려는데 선배가 말했다. “뉴코아에서 등산화를 싸게 판다는데 보러 가지 않을래?” 80% 할인이라고 적힌 지하 매대에서 선배는 푸른 신발을, 나는 붉은 신발을 샀다. 선배는 몸이 허락하는 날에는 늘 산에 갔다고 했다. 두 번쯤 동행했다. 어느 봄날,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면서 선배가 말했다. “산은 하루도 같은 풍경이 없어. 계절의 변화는 정말 경이로워. 수리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선배는 하루하루에 감사했다.


솔잎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한국에 살 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 산은 대부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고 온화하다. 어디나 뒷산이 (하다못해 뒷동산이라도) 있다는 것은. 교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다녔던 학교 교가는 “인왕산 넘고 넘어 들 넓은 곳에”나 “용마산 한어리에 자리를 잡고”로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다닌 학교 교가도 첫소절이 “수리산의 정기로 이어온 터에”였다. (교가를 조사해보면, 모르긴 해도 산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이 제일 많을 것이다.)

산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도 산에서 많이 놀았다. 산딸기를 따 먹고, 잠자리를 잡고, 도마뱀을 쫓아다녔다. 초등학교 첫 소풍도 ‘애기릉’으로 갔다.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작은 무덤이 있었다. 거기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그 둘레에 앉아 수건돌리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상하겠지만, 그때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산에 무덤은 흔했다. 이 이야기를 하니 우리 아이들은 만화 <검정고무신>을 떠올리던데, 1970년대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추석을 앞두고 늘 송편을 빚을 준비를 했다. 쌀가루를 익반죽해서 치대고, 깨와 콩으로 소를 만들어놓고 우리를 부르셨다. 모여 앉아 송편을 빚을 때마다 엄마는 “이걸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댄다.”고 말씀하셨다. 엄마 송편은 동글동글 매끄럽고 예뻤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어느 해엔가, 송편을 찌려는데 시장에서 솔잎 구해 오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어둑한 저녁에 집을 나섰다. 한참 후에 주머니에 뾰족한 솔잎을 가득 넣고 돌아오셨다. “뒷산에 가서 따왔다. 누가 볼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추석 전날 밤, 정직한 우리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산에서 큰 절도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소심한 분인지는 그때 알았다.

※ 이번 기사는 <등산화, 봄이왔다 2>로 이어집니다.


글 | 사진. 이향규
남편과 두 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에서 산다.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후아유>,<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같은 책을 냈다.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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