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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3 컬쳐

키노 아시아

2020.03.19 | TREND

주기적으로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것’을 내놓길 바라는 패션계에서 ‘차용’은 불가피하다. 주로 다른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빌려와 컬렉션의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차용의 패션은 당연히 패션의 대량생산이 시작된 서양에서 먼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션의 대중 소비가 가능해지자 유행이 돌아가는 사이클은 더욱 가속화됐고, 서양의 디자이너들은 영감을 찾아 ‘신비한 오리엔트’나 ‘미지의 아프리카’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서양의 동양에 대한 ‘애호’는 수백 년 전 부터 ‘시느와즈리(chinoiserie)’나 ‘자포니즘(japonisme)’의 형태로 등장했다. 이후로 동양의 문화는 탈맥락화되어 파편으로 흩어져 서양 브랜드의 컬렉션에 흡수되었고, 시즌이 지나 트렌드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동양에서도 서양의 문화를 마구잡이로 소비한다. 하지만 그 동기가 다르다는 것이 요점이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다른 한쪽에서는 ‘어울리기’ 위해 그 문화를 받아들인다. 각 문화가 차지하는 위계가 다르니 그것이 패션이 되었을 때 풍기는 뉘앙스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한편 아시아 국가의 경제 성장에 따라 패션계에서도 반격이 시작됐는데, 가장 흥미진진한 시선을 내놓고 있는 세 사람을 소개한다. (인물 이름 대부분이 아직 한국말로 소개되지 않아, 발음상의 문제로 영자 그대로 표기한다.)


YUHAN WANG

런던 기반 중국인 디자이너 Yuhan Wang의 컬렉션을 처음 본 것은 작년 이맘때, 19FW 컬렉션이 발표되었을 시기였다. 이 룩북에는 진짜와 가짜가 공존한다. 프린트된 야외 배경 앞에 진짜 모델이 서 있다. 프린트된 배경과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은 모두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르누아르 그림에서 볼 법한, 주말 야외로 나가 햇살을 즐기는 청년들이 하고 있을 법한 차림이다. 다만 르누아르 그림에서 따뜻함과 생동감이 느껴진다면, Yuhan Wang의 세계는 조금 더 기묘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 회화에 없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동양인이다. 당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동양은 단 한 번도 그들 그림 속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 동양은 늘 ‘중국풍 정원’이나 ‘일본풍 가구’ 등으로 희석되어 그들의 그림에 등장했다. 즉, 동양은 늘 어느 정도 ‘가짜’였다. 한편 Yuhan Wang은 ‘진짜’를 동양인으로, ‘가짜’를 유럽풍 야외를 내세우며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이제껏 공존하지 못했던 요소를 함께 배치함으로써 낯설게 만들고 있다. 즉, 오래된 것을 새로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에서 받는 기이한 인상은 옷 자체에서도 이어진다. 비대칭에 마구잡이로 주름이 잡히고 여기저기가 찢긴 듯한 드레스는 낭만적이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Yuhan Wang은 지난 2월 LVMH에서 매년 유망한 신인 디자이너들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LVMH Prize의 쇼트리스트, 즉 준결승 선에 올랐다. 미래를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패션의 세계에서, 과거에서 새로움을 길어낸 Yuhan Wang은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 Yuhan Wang 19FW Campaign


JULIAN SONG WAN JIE

상하이 기반 포토그래퍼 Julian Song Wan Jie(이하 Julian Song)의 사진이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한국의 브랜드 ‘기준(Kijun)’의 20SS 컬렉션일 것이다. 영화 <첨밀밀>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는 이 컬렉션과 모델이 풍기는 전체적인 느낌 때문에 반포한강공원에서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홍콩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파트 빌딩을 배경으로 모델이 꽃을 들고 팔을 위로 향한 사진이 가장 눈에 띈다. Julian Song의 사진에서는 유난히 랜드마크 빌딩과 상승 이미지가 많이 보인다. 이 같은 사진이 아니면 위에서 찍은 버드아이 뷰의 사진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런 구도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개발도상국, 즉 중국의 압도적 거대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높은 빌딩과 정적인 모델의 포즈는 경제 성장에 뒤따르는 엄격함과 획일성을 표현한다.

한국의 기준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다른 신진 브랜드를 위해 촬영한 룩북 사진에서도 이런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Julian Song이 ‘동양적 무드’ 같은 얄팍한 트렌드에서 벗어나는 점이 있다면, 그의 사진에서 항상 유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가족 모임, 학교, 방송 등 공동체를 한 번에 찍은 화보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촌스러움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웃음을 자아낸다. 명품 화보를 찍더라도 너무 ‘진지하게’ 연출하지 않는 것이 Julian Song의 매력이다. 유머 감각은 발렌시아가, 구찌 그리고 국내의 아더에러 같은 브랜드의 룩북에서도 발견되는 트렌드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Kijun 20SS


MINJU KIM

넷플릭스의 <넥스트 인 패션>을 챙겨 본 사람이라면 이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혹은 레드벨벳의 열렬팬이라면 이 이름을 아주 예전부터 알았을 것이다. 레드벨벳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한 Minju Kim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션 리얼리티 쇼 ‘넥스트 인 패션’의 우승자로 발표됐다. Minju Kim이 19SS 컬렉션을 서울패션위크 ‘제너레이션 넥스트’ 스테이지에서 선보였을 때 특유의 오버사이즈 실루엣이나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리본, 퀼팅 작업 등이 브랜드의 시그니처 룩으로 보였다.

바로 다음에 나온 19FW 컬렉션에서는 Minju Kim이 능통한 패턴 작업이 돋보였다. ‘LET THE RIGHT ONE IN’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렛미인>으로 알려진 스웨덴 영화에서 영감을 따온 이 컬렉션에서 보이는 패턴은 영화 <미드소마>에 나온 벽장식과 비슷한, 스칸디나비아 전통 벽걸이 공예품인 태피스트리에서 발견될 법한 패턴이다. 이 패턴을 니트에 수놓는 대신, 비닐 느낌이 많이 나는 가죽이나 뻣뻣한 PVC에 새겨 넣어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이런 식의 패턴 디자인은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Minju Kim이 이어온 작업이다. 18FW에서는 한국식 자개 패턴을, 이번에 <넥스트 인 패션>으로 공개된 컬렉션에서는 멕시코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는 패턴을 사용했다. 그래픽디자인과 패턴을 이해하는 사람이 다른 문화권의 패턴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방식은 단발적인 ‘트렌드’를 위해 외부를 기웃거리는 이의 시선과 다를 수밖에 없다. 지속적 고민을 해온 사람의 독창적 견해에서 탄생한 것인가, 단기간에 수익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이는 삶을 견디게 하는 예술과 삶을 갉아먹는 상술의 차이다.

사진 출처 Minju Kim 19FW ‘LET THE RIGHT ONE IN’


문재연
영화 팟캐스트 ‘씨네는맞고21은틀리다’에서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 모자라
브런치와 왓챠에서 ‘puppysizedelephant’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커서 뭐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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