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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0 컬쳐

아직은 다정함을 말할 때 - 50회 맞은 서울독립영화제 미리 보기│혹은 오래된 것들과 오래도록 만나는 법

2024.12.13

영화 〈에스퍼의 빛〉 스틸

글. 정지혜 | 스틸 제공. 서울독립영화제

프리랜서 영화 원고 노동자인 나는 국내에서 진행되는 여러 영화제의 일정에 따라 계절과 절기와 세월을 가늠하곤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11월 28일부터 12월 6일까지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가 열리고 그 말은 2024년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독제야말로 한 해의 한국 독립영화를 결산하는 자리이고 연말 가까이 열리다 보니 이래저래 나의 올해도 마무리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올해로 서독제는 50회를 맞았다. 1975년 한국청소년영화제로 시작해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도 지금의 자리와 토대를 만들어왔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최근 서독제가 직면한 난제를 생각하면 지금은 어떤 중대한 기로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불안감을 불러일으킨 데는 이유가 있다. 2025년 정부의 영화발전기금 예산안에서 서독제의 예산이 전액 삭감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독제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 (사)한국독립영화협회가 공동 주최하는 대표적인 독립영화제이다. 1999년 영진위가 민간 자율 기구로 거듭나면서 민관 거버넌스를 구체화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고, 영진위에서 ‘독립영화’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승인한 상징적 사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진위와 그 상위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서독제의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니. 전례가 없는 듣도 보도 못한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조차 알 길이 없다.

그간 서독제는 양적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거듭해왔다. 출품작이 60여 편이던 1975년과 비교하면 올해는 무려 1,704편이 영화제의 문을 두드렸다. 놀라운 성장이다. 매년 작품 공모를 할 때마다 역대 최다 작품 수를 경신한다. 신진과 기성의 영화인들이 한 해의 독립영화를 보고, 말하고, 다시 영화를 만들 동력을 얻는 긴요하고 긴밀한 자리이기도 하다. 경쟁, 비경쟁 섹션을 통해 새로운 영화들을 소개하고 아카이브전을 통해 구작을 다시 보고 해외 영화까지 수급해 내실을 다져왔다. 토크 프로그램, 배우 프로젝트 등을 비롯한 이벤트도 여럿이다.

말하고 보니 반문도 든다. 영화제의 양적, 질적 성장과 내실을 다져왔다는 것을 강조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자본과 시스템, 체제와 기성에 편입되거나 휘둘리지 않는 방식으로 창작을 지속해가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영화제가 있는데, 그것이면 충분한 게 아닌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저 문장을 다시 끌고 와 잘하고 있는 것을 잘하라고 지원하면 될 일이 아닌가. 왜 설명도, 소통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산을 없애 버리는 것일까. 정말 궁금하다.

영화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 스틸

그래서 더 열심히, 치열하게 독립영화

기존의 예산을 복원하고 나아가 정부의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어쩌면 내년에는 서독제 없이 연말을 맞는 게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우려를 하게 된 상황 자체가 지금이 얼마나 기이한 세계인가의 방증인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비평하는 나로서는 더 열심히, 치열하게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말하고 싶다. 창작자들도 더 크게 영화와 영화제를 말하고 관객분들도 영화제 기간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더 자주 와주면 좋겠다.

올해 장편영화 예심 위원으로 참여해 흥미로운 영화들을 미리 만났다. 내친김에 소개를 좀 해야겠다. 본선 장편 경쟁 부문에 출품한 199편의 영화 가운데 최종 12편을 선정했다. 〈가끔 구름〉,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를 통해 평단의 고르고 진지한 지지를 받은 박송열은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로 한층 견고해지고 확장된 형태로 자기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 두 번째 장편작으로 돌아온 감독들도 다수다.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3학년 2학기를 보내는 10대

들의 시간을 과장됨 없이 묵묵히 지켜보고 지지하는 이란희의 〈3학년 2학기〉, 특유의 유려함과 우아함을 견지하면서도 한층 과감하게 세계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실험하는 조희영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정갈하고 말간 얼굴로 이야기의 품을 넓히고 영화에 신비로운 미로를 만들어 낸 이제한의 〈환희의 얼굴〉, 근래 좀처럼 보기 드문 강렬한 감정의 드라마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강미자의 〈봄밤〉이다.

영화 〈비트메이커〉 스틸

데뷔작들은 언제나 눈여겨보게 된다. 이승재의 〈허밍〉은 영화 현장의 녹음 기사와 배우의 관계를 통해 영화와 현실, 삶과 죽음을 그리고 그 하나 될 수 없는 세계를 허밍이라는 장치로 꿰어낸다. 신인기의 〈비트메이커〉는 판소리와 힙합이라는 전혀 다른 두 음악 세계를 통해 세대 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기성의 질서에 다른 리듬과 균열을 만든다. 다큐멘터리들도 강세다. 박민수, 안건형의 〈일과 날〉은 나이, 성별, 직업과 관계없이 한국 사회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동을 성실히 그리는데 그것이 주는 비범함이 있다. 조세영의 〈K-Number〉는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이들이 자신의 역사를 되짚는 과정을 통해 그간 가시화되지 않았던 존재들, 한국 사회의 민낯과 마주한다. 다큐멘터리에 실험적인 면모가 강하게 들어가 있는 작품들도 있다. 정재훈의 〈에스퍼의 빛〉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마음과 그들만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하며 여러 차원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박지윤의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는 비인간 식물의 입장과 시선, 목소리로 인간 중심의 세계에 일침을 가한다. 유일한 애니메이션인 허범욱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시대를 향한 서늘하고 처절한 우화이다. 어디 언급한 12편의 영화뿐이겠는가. 장‧단편을 아우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 올해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사라져가는 것 투성이다. 오래된 극장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고 긴 세월을 견뎌온 영화제도 사라졌으며 옛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영화제에 가면, 극장에 가면 오가며 우연히 만나 안부 인사도 전하고 영화 얘기도 했건만. 그런 자리와 공간과 계기와 기회가 필요하다. 그런 것들과 오래도록 만나면 좋겠다.


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 강연, 비평 워크숍 등을 기획, 진행하는 ‘플로모션(flowmotion)’ 운영. @hwasile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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