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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5 에세이

승리일 수 없는 승리 (2)

2024.01.27

이 글은 '승리일 수 없는 승리 (1)'에서 이어집니다.

조용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스라엘의 집단 학살에는 국제사회의 일원인 한국도 연루되어 있기에 당연히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주거지를 부수는 데 한국산(HD현대) 포클레인이 쓰인 사실을 비판하면서, 팔레스타인의 BDS(보이콧·투자회수·제재) 운동을 지지하고 동참하는 일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75년 넘게 이어진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의 역사를 끝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간혹 고개를 들었다. 한국이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79년이 흘렀으나 그 후유증은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널리즘의 모범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미국 언론 역시 이스라엘인의 사망을 “살해당했다”라고 표현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사망을 “죽었다”라고 적는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집단 학살의 단단한 뒷배다. 미국 언론들이 팔레스타인인보다 이스라엘인의 죽음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현저한 힘의 불균형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능성을 딛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개의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 ‘누군가’가 자주 친구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친구인 시오는 지난 10월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시를 한국어로 번역해 팔레스타인에 연대를 표현하고 있다. 그가 시를 번역해보겠다는 마음을 굳힌 건 아랍인 친구의 SNS를 보고 나서다. “무슬림이 아닌 친구들에게 부탁하건대, 제발 팔레스타인에 대해 공부하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시오는 정말 그 친구의 말대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제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멈추게 해달라고, 매일 비는 마음으로 번역을 하고 싶었어.

그렇게라도 매일 팔레스타인을 생각이라도 하려고 해.

내 일상과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제노사이드를 떨어뜨려 생각하면 상황에 무뎌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시오는 한국에 살지만, 자신의 일상에 팔레스타인을 집어넣었다.

또 다른 친구인 지우는 지난 10월부터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규탄하는 집회에 나간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인 남자 친구와 이스라엘에 사는 친구들이 있지만 집회에 나간 뒤로는 그들과의 관계가 끊기게 됐다. 이스라엘에서 사귄 친구들이 지우의 SNS에 비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지우는 이들의 메시지에 기나긴 답변을 보내는 동시에 집회에도 예정대로 참여했다.

친밀한 관계인 이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일은 지우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렇게 했다. 지우는 자신의 SNS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치즘에 대해 배웠고, 일본의 불법적인 주권 침탈에 따른 한국인의 고뇌에 대해 배웠습니다. 알제리와 아일랜드의 치열한 독립 투쟁에 대해 배웠고,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평생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저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Ceasefire now(지금 총을 내려놓으라). Be human(인간답게 행동하라).” 지난한 무력감을 넘어 살해당하는 이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친구들에게 배운 마음을 품고서 2024년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소개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함께 만들고 동명의 책을 썼다. 사람 하나, 개 하나랑 서울에서 살고 있다. [email protected]


글.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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