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도, 무대장치도 없이 덩그러니 마이크 하나만 놓인 공간. 객석보다 단순한 그 무대 위에 차곡차곡 웃음의 장면들이 쌓인다. 통통 튀는 에너지가 배우와 관객 사이를 천연덕스럽게 오가는 곳. 한국 최초의 임프라브 전용 극장 펀타스틱 씨어터에서 ‘즉흥’이 여는 새로운 챕터를 관찰한다.'

작은 극장들을 다니며 연극을 보는 건 내 오래된 취미다. 열 살에 처음 본 아동극 <바람이 가져다준 선물>부터, 며칠 전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관람한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까지 연극은 종종 내 일상의 공백을 채웠다. 본격적인 대학로 소극장 탐방이 시작된 건 고등학교 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푯값만 모이면 대학로 소극장에 가 올록볼록 손으로 만져질 듯한 무대 위 세계를 목격했다. 극장 안을 꽉 채우는 배우들의 에너지에 집중하다 보면 이내 다른 세계로 내 몸이 미끄러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걸 교감이라 불러야 할지, 카타르시스라 불러야 할지 당시의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상호 작용은 다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입체적인 것이었고, 그 에너지들은 내 일상에서 종종 양의 방향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영난으로, 또는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는 소극장 소식을 들을 때면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고 만다. 그 안에 담길 이야기들과 강렬한 에너지들이 공중에 휘발될 것 같아서. 문화를 배양하는 토대가 점점 납작해지고 있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 색을 지닌 극장들을 찾아다니며, 보고 싶은 공연들을 성실히 관람하는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임프라브 전용 극장

ⓒ 손영규
“공연 보러 오셨어요? 20분 전부터 입장이 가능합니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셔도 돼요.”
대학로나 홍대 극장은 익숙했지만, 삼각지역에 있는 극장은 처음이었다. 이곳, 펀타스틱 씨어터를 찾은 건 <2022 코미디캠프>라는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관람을 위해서다. 내 인생 두 번째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처음은 무려 중국 베이징에서였는데 ‘bookworm(책벌레)’이라는 북카페 겸 바에서 여는 조그만 공연이었다. 표현의 자유가 다소 제한적인 이 회색의 도시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은 모두에게 해방구 같은 역할을 했다. 영어와 중국어로 진행하는 공연이라 흐름을 100% 따라가긴 어려웠지만, 그 공간 안에 흘렀던 위트와 의외성, 그리고 뭐든 받아들여지는 관용의 정서만큼은 고스란히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펀타스틱 씨어터의 텅 빈 무대 위. 스탠딩 마이크만 없을 뿐 베이징 공연과 무대 위 구성은 비슷했다. 2022 코미디캠프는 네 명의 화자가 나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코미디를 구사하는 옴니버스 구조의 공연이었다. 1시간 30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페미니즘부터 젠더 이슈, 그리고 장애인에 관한 화두까지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이야기들이 무대 위에 가득 쌓였다. ‘코미디’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공연이었지만 ‘실험’과 ‘씨앗을 뿌린다’는 측면에서 나에겐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물론 터져 나오는 웃음을 확 풀어놓는 즐거움도 있었고.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공연을 상연하는 물리적 토대인 극장이 궁금해졌다. 스탠드업 코미디 전용 극장이라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무대와 객석 사이의 단차도 일반 소극장과는 달리 현저히 낮았다.
집에 돌아와 극장 홈페이지를 찾았다. 한국 최초의 임프라브 전용 씨어터라는 문구가 보였다. 임프라브(Improv). 이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즉흥 연기, 즉각적인 생각에 의한 행동, 예술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전용 극장이 만들어질 만큼 임프라브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무렵,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저 너머에 구축되어 있음을.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SCI(Seoul City Improv) 팀부터 크고 작은 공연, 트레이닝 단체들까지, 공연뿐 아니라 기업이나 개인들의 역량 개발 프로그램으로도 임프라브는 활발히 쓰이고 있었다.
"임프라브는 관객이나 배우 등 타인이 제시하는 단어나 문장을 잘 듣고 그것을 이어서 즉흥적으로 극을 만들어가는 연기 방식이에요. 대본이 없으니 일반적인 리딩 연습은 없지만 공연 전까지 다른 방식의 훈련을 꾸준히 하죠. 창의적으로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 자신감 있게 발화하는 것, 그리고 상대의 말이나 대화의 맥락을 잘 캐치하는 소통의 훈련까지. 임프라브가 주는 가능성과 즐거움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글은 '무대 위, 즉흥의 챕터가 열린다 ― 펀타스틱 씨어터 (2)'로 이어집니다.
글. 김선미
사진. 김선미·펀타스틱 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