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산호 일러스트
“사람들이 제게 집중하면 심하게 긴장을 해요.” “말할 차례가 되면 머리가 하얘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고충을 토로하는 이들은 자기가 말을 못하는 유형이라고 단정 짓고 말수 자체를 줄이는 경향이 있죠. 나서서 발표할 일을 가능하면 만들지 않으려 하고 회의 때도 다른 사람의 말에 호응만 하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사회초년생일 때 월례회의 시간이 돌아오는 걸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나이 많은 팀장님이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50대였던 남성 상사는 표정이 별로 없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어서 ‘뭐가 마음에 안 드시나?’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게 맞나?’ 같은 생각이 자꾸 들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목소리가 쪼그라들고 호흡이 불안해졌죠.

ⓒ 최산호 일러스트
직속 선배나 동기들과 회의할 때는 괜찮은데 유독 상사 앞에만 가면 얼어붙으니 발표할 게 있으면 선배에게 대신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많았습니다. “저는 잘 못하니 선배가 대신 좀 해주세요.”라며 말이죠. 입 밖으로 나온 모든 말에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어느 정도 포함되기 마련이어서 그 과정에서 제가 정말로 공적인 말하기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지금까지의 행동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20대 후반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협력업체의 남성 부장 앞에서 차주 콘텐츠 방향을 설명하고 있던 도중이었습니다. 제가 발표하는 중에 그 사람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회의실 안에서 전화를 받더군요. 그 어떤 양해의 말도 없이 30초 정도 큰 소리로 통화를 하더니 앞문을 열고 전화를 받으러 나갔습니다. 잠시 멈춰 있다가 그가 나간 뒤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발표를 이어가야 했는데 순식간에 속에서 성냥을 그어 불꽃이 확 피어오르는 듯했습니다. 그 열기로 얼굴까지 홧홧해지는 걸 느꼈어요.

ⓒ 최산호 일러스트
회의실 안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계속 생각했습니다. 나라면 전화를 받지 않을 텐데, 혹여 너무나 긴급한 전화였다면 죄송하다고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양해를 구한 뒤 나가서 전화를 받았을 거야. 저 사람 내가 나니까 만만해서 그러는 거 맞네. 공효진이 출연한 영화 <미쓰 홍당무>의 대사가 어찌나 파고들던지.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나한테 안 했을 거면서 내가 나니까 다들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더 당황스러웠던 건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고 난 후였습니다. 함께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과 그 상황이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일이 있었는데 제게 너무나 굴욕적이었던 그 상황을 다들 기억조차 제대로 않고 있는 겁니다! 당황해서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자 다들 이제야 기억이 난다는 표정을 짓다가 ‘그럴 수도 있지. 그 정도는 별것 아니지 않나.’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하대했기 때문에 고의로 그런 행동을 한 거라고 앙심을 품고 있던 저는 생각의 회로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이 글은 '당신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얼어붙는 거예요 (2)'로 이어집니다.
글. 정문정
일러스트. 최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