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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4 에세이

글 라디오 :: 가위

2021.12.10 | 가위에 눌리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다

살면서 딱 한 번 가위에 눌려봤다. 그래서 또렷이 기억한다. 이제 막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이었다.

나는 잠들어 있었다. 감기를 앓느라 지쳐 다른 날보다 일찍 잠든 날이었다. 무언가에 쫓기고 내내 시달렸다. 괴로워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것들은 진짜가 아니구나. 환상의 장벽 너머로 어렴풋이 현실의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기 소리. 악몽으로부터 나를 건져올리는 끈이었다. 나는 꿈속의 장면과 소리들을 힘겹게 밀어냈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운 돌을 옮기듯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샤워기 소리는 엄마가 화장실을 청소하는 소리였다. 오른쪽 방문을 넘어 화장실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팔과 다리에 힘을 주었다. 몸은 눈꺼풀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내가 애를 쓸수록 이미 열로 달아오른 몸이 더 뜨거워졌다. 이불 위에 뉘인 나의 몸은 어긋난 병뚜껑이었다. 병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병에서 풀려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끼워져 있는 병뚜껑이었다. 억지로 힘을 주면 전부 깨어질 것만 같았고, 다시 잠들 수도 없었다. 눈을 감으면 급강하하는 비행기에 실린 것처럼 방바닥 밑으로 몸이 쑥쑥 빠졌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이 깨어질 것을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몸은 깨지지 않았다. 날 짓누르던 가위를 벗어낸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난 화장실 앞에 섰다. 욕조를 닦고 있는 엄마의 등에다 소리쳤다. “엄마!”

그러나 아무것도 공명하지 않았다. 공간은 쏴아- 샤워기 소리로 가득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목에 다시 한번 힘을 주었지만 작은 숨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겨우 새어나올 뿐이었다. 답답해진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별안간 엄마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자~”

나는 엄마를 향해 입 모양으로 간절히 이야기했다.

“엄마… 나… 목소리가 안 나와…”

하지만 엄마는 대답 없이 다시 욕조로 몸을 기울였다. 어서 자. 그 말을 하며 엄마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내가 서 있는 곳보다 먼 데에다 소리를 던지는 듯 했으나, 그럼에도 나는 그 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조용히 자리로 가 다시 누웠을 때 더는 무언가에 짓눌리거나 밑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소리를 내보았다. 아직 감기가 덜 나은 맹맹한 소리였지만, 소리가 났다. 바로 엄마에게 달려가 조잘댔다. 엄마, 나 어제 자다가 깨서 화장실 앞에서 엄마한테 말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고. 감기 때문인가?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렇게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오기도 해? 그런데 어제는 기침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내 얼굴이 심각해 보이지 않았어? 어떻게 그렇게 계속 화장실 청소만 했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서 자라고 했어?

엄마는 요리를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무슨 말이야? 엄마는 어제 네가 방에서 너무 끙끙대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기에 빨리 자라고 한 건데. 그리고 엄마 어제 화장실 청소 안 했어.

목소리가 닿지 않는 마음들의 소리

그 뒤로도 이따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이 나를 괴롭힐 때, 소리쳐 그것을 물리치려 하지만 내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꿈. 대학생이 되어 그런 비슷한 꿈을 꾸던 어느 새벽이었다. 몇 번을 소리쳤으나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한 순간 모든 물이 갑작스레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처럼, 음소거가 되어 있던 리모컨을 누군가 잘못 밟아 갑자기 소리가 켜진 것처럼, 나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온 가족이 놀라서 다 깼다. 엄마가 괜찮냐며 방문을 열어젖히고 난 괜히 창피해서 계속 자는 척했다.

난 이제 가위도 눌리지 않고 꿈속에서 누가 날 괴롭혀도 소리를 잘 지른다. 대신 꿈속에서만 질러도 될 소리가 현실 세계로도 터져나오는 부작용이 생겼다. 엠티를 가서 자다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곁에서 곤히 자던 아내가 내 고함 소리에 놀라 몸을 파르르 떨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얼떨결에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난 거기에 다시 놀라 함께 침대에서 펄펄 뛰기도 했다. 이제 성우씩이나 되었으니 더 자신감 있게 소리를, 아니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가끔은 그리 대단한 악몽도 아닌데 미리 소리부터 지른다. 악몽 예방 주사라고 할까. 커다란 고함으로 악몽의 접근을 막는다고 하면 무슨 아프리카 부족 같아 보이려나.

누가 가위에 눌렸을 때에는 손끝이나 발가락부터 조금씩 움직여보라는 조언을 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 마나 한 조언이다. 내겐 이제 날 누르는 가위가 고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악몽을 조용히 처리할까. 꿈속의 괴로움을 현실로 옮기지 않을까.

우리가 화가 나 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눈앞의 상대로부터 마음이 저 멀리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산 너머에 있는 것처럼 나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목소리도 안 들린다.

며칠 전에는 자고 있는데 아기가 느닷없이 울었다. 녹음을 잔뜩 앞둔 새벽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대본을 봐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웅크려 자다가 울음소리에 깨어났다. 새벽 2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이제 18개월의 생을 지나고 있는 아기에게 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맨 정신으로. 일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날 예민하게 하고 그 날카로움이 현장에서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것은 어떻게든 위험한 법이다. 아기에게 날카로운 걸 피하라고 그렇게 당부해놓고는, 스스로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밤새 날 괴롭게 했다. 지독한 가위처럼.

이제 나는 생각한다. 가위에 눌리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다고 말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가 가위가 될 수 있다. 날카로운 이빨로 관계의 끈을 자르고 목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사이를 벌려놓을 수 있다. 그때는 악몽을 꾸는 게 문제가 아니다. 악몽을 살게 될지 모른다. 그러느니 차라리 잠깐의 비명이 낫다.

아침이 되었다. 거의 밤을 샌 나의 입속은 모래를 씹은 듯 했다. 그 입으로 대사를 연습하는데 아기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잠에서 깨어난 아기의 얼굴은 말갛다. 나는 얼른 아기를 안아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속삭였다. 어제는 아빠가 미안해. 아기는 내 말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펜슬을 들고 태블릿 대본에 낙서를 하며 해맑게 웃는다.

그 낙서를 녹음실에 가서 지우개로 지우며 기도했다. 나의 고함도, 너의 눈물도, 우리 안의 어떤 생채기도, 우리를 짓누르는 가위와 서로를 가르는 가위도, 이렇게 말끔히 지워지는 낙서와 같기를.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4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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