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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0 에세이

공손과 불손, 당신의 한국어는 안녕하십니까?

2021.10.15 | 말과 삶 사이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 산울림의 ‘너의 의미’ 중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기호라고 할 때, 존재는 일종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존재를 다 담아내기에 언어라는 그릇은 때로 매우 좁고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릇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실체를, 의미의 윤곽을 발견할 수 있기에, 그릇의 형상, 즉 언어라는 형태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흔히 문법 형태는 고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는 제도화된 교육과정 속에서 문법 시험 등을 보면서 더욱 고착화되곤 하는데, 사실상 하나의 문법 형태는 그 형태가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무수한 기능과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어 교육에서 주목하는 문법 형태의 의미는 바로 이렇게 사용되는 맥락에 있어서의 의미이다. 문법 형태의 뜻을 아무리 암기한다고 할지라도 실제 의사소통에서 그 문법 형태를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암기한 고정적 의미가 아닌, 맥락에 따른 역동적인 의미들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장님, 우리 같이 점심을 먹읍시다”

청유형 종결어미 ‘-읍시다’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한들, 한국 사람들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읍시다’로 청유하는 일이 많지 않다는 맥락적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은 학습자라면, 틀림없이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모어 화자라면 응당 알고 있을 직관에 포함되는 ‘문법 형태의 맥락적 의미와 기능’이 외국인 학습자에게는 부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를 애써 가르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문법 공부를 열심히 하여도 매끄러운 의사소통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 특히 말은 사람의 감정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맥락에 적절한 의미의 형태를 선택하여 사용하지 않는다면, 졸지에 불손한 사람이 되거나 공격적인 존재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학술적인 용어로 ‘체면(face)’이라고 하는 개념은 언어 사용자가 응당 존중받아 마땅하며, 동시에 존중받기를 바라는 정체성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맥락에 따라 적절한 형태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말은 상대면의 체면을 다치게 하는 ‘체면 위협 행위(face-threatening act)’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문법의 선택과 사용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가 판단하는 ‘공손’ 그리고 ‘불손’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게 된다. 앞선 연구들에 따르면 특정 언어권에서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거절을 하는 것이 용인되는 반면, 상대적으로 한국어등 아시아어권 문화에서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거절이 불손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

막말과 욕설 사이

한국어에서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막말 ’이라는 말이다. 사전에서는 막말을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는 말이나 속된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속된 말이 욕설에 가깝다면, 막말은 한국 사람들이 응당 그러하리라고 생각하는 도리를 저버리는 말을 가리키는 어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개새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욕설이라고 하지 막말이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막말 파문’, ‘막말의 아이콘’, ‘막말 세례’ 등을 검색해보면, 대개 말 자체는 상스럽지 않지만, 상대방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쉽게 내뱉은 말들을 막말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이혼을 해서 오랫동안 힘들어했던 친구에게 ‘너는 결혼 안 하니?’라고 묻는다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요인들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런 말들을 막말이라고 명명한다. 분명 욕설도 아닌 것이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고,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쉽게 내뱉어져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로 작용하는 말들. 그런 말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서로의 체면과 마음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마음을 쓰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반드시 공손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의도에 따라 불손함을 가득 담아 말할 줄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한 언어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항의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항의하고, 분노하고 싶은 마음을 정확한 분노의 언어로 담아내는 것, 불손을 적확하게 불손으로 표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다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자신이 선택하고 있는 언어라는 형태들이 특정 맥락 속에서 공손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또는 불손으로 받아들여지는지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언어 지식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문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여야 할 것이다.


김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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