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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7 에세이

어느 시인의 일기

2019.08.22 | 대표 사진

꿈을 꾸었는데 하루를 망치기에 좋은 꿈이었다. 카페에서 연유라테를 마시고 있었는데, 모자를 쓴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다. 지나 가는 것만으로 칼집이 난 것처럼 허공이 찢어졌다. 전 애인이냐? 옆에서 녹차라테를 마시던 친구가 물었다. 젠장! 맞아! 하고 외치며 꿈에서 깼는데, 돌이켜보니 모자를 쓴 사람은 전 애인이 아니었다. 그는 꿈에서 처음 보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지나갈 때 마음이 찢어져서 전 애인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나저나 전애인이 뭐지? 전기과 애인의 준말인가? 전전 애인은? 전기전자과 애인? 그럼 전전전 애인은 전기전자전파공학과 애인?

평균 11시 반에 일어나지만 늘 ‘내일은 30분 일찍 일어나야지’ 하고 다짐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그다음 날은 11시, 그다음 날은 10시 반, 그다음 날은 10시에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9시 반에 일어나는 날엔 반드시 실패해서 새벽 6시경에 잠들고, 오후 12시 에 일어난다. 다시 다짐을 반복한다. 다음 날은 11시 반에 그다음 날은 11시… 그리고 9시 반에 일어나기에 실패해서 다시 12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틸컷

접근하면, 9시 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뻥 차서 12시 내 고향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12시경에 일어나 대충 씻고 도서관으로 가다가 악몽의 잔상 때문에 카페로 자전거 바퀴를 돌렸다. 우체국에서 구독자들에게 우편 일기를 부치고 좋아하는 카페로 갔다.

카페에서 볼라뇨의 <참을 수 없는 가우초>를 읽고서 역자 후기를 읽었다. 역자 후기는 가급적 읽는 편이다. 줄거리를 요약해주기 때문에. 내 독서력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줄거리 파악을 잘못한다는 점이다. 책을 읽을 때 줄거리만 빼고 다 읽는 모양이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의 단편집이다. 이경민 번역가는 단편 <두 편의 가톨릭 이야기>를 “성직자가 되려는 소년과 어 느 살인자의 기막힌 조우를 그린 작품이다”라고 요약한다. 그제 야 나는 깨닫는다. ‘등장인물이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두 명이었군! 그 사람이 살인자였단 말이야? 어째… 음산하더니.’

역자 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의 세 번째 단편집이자 첫 번 째 유작이 되었다.”

보통 유작은 유일하다. 죽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 유작이니까. 그런데 유작이 두 편이면 그 사람은 두 번 죽은 사람인 건가? 역자가 첫 번째 유작이라고 말하니 유작의 다음 편, 두 번째 유작, 세 번째 유작…… n번째 유작도 있을 것만 같다. 만일 모든 작품이 죽기 직전에 쓴 것이라면 작가가 쓴 모든 작품은 유작인지도 모른다.

책 소개에 이렇게 써도 웃길 것이다.

“*** 작가가 남긴 유작!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작품!”

그런데 *** 작가는 아직 죽지 않아서 독자들을 실망시키는 구조 로 마케팅을 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죽기 전에 쓴 작품입니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잖소.

-죽기 직전입니다!

혹은 작가에게, 자신의 작품에서 유작을 고를 기회를 주어도 좋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의 유작이지만, 과연 그는 이 작품이 유작이기를 바랐을까? 아이폰에는 ‘LIVE photo’ 라는게 있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과 그 전후가 모두 찍히는 사진이다. 사진 영상 혹은 영상 사진이기도 하다. 정지된 사진으로 보이지만 손가락을 갖다 대면 촬영 전후가 영상으로 함께 기록 되어 느린 움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측의 편집 버튼을 누르면 하단에 파노라마처럼 사진이 펼쳐지고, 바를 움직여 대표 사진을 선택할 수 있다. 이딴 식으로 글쓴이가 전 생애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써 내려간 작품들 중에서, 한 작품을 유작으로, 대표 사진으로 고르는 것이다.

Writer 문보영

Editor 손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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