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계속되고 습한 기운이 몸에 가득 찬 날에 생각나는 음식은 평양냉면이다.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마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평양냉면이 미식가들의 자부심에서 대중들의 관심으로 급부상했다. 시장도 어느 정도 성숙했고 즐기는 이들도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주며 ‘우래옥파, 을밀대파, 을지면옥파’ 등으로 계통까지 나눈다. 어느 냉면이 더 맛있는 건 없다. 단지 여름을 이기는 시원한 힘을 줄 뿐이다.
평양냉면은 겨울 음식이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메밀로 면을 만들고 동치미 국물로 육수를 만들었다. 이북에 뿌리를 둔 이 면 요리는 한국전쟁 이후로 부산에서는 밀면이 됐고, 서울에서는 ‘서울식 평양냉면’이 됐다. 시대를 관통하면서 냉면은 점차 변형되고 진화했다. 우리가 지금 먹는 냉면은 그때 그 맛은 아니라도 현재의 미식으로, 그 각별한 매력으로 소구력을 갖는다.
10여 년 전에만 해도 평양냉면은 비싼 음식이고 쉽게 접할 수 없어서 소수 식객들에게만 허락된 미식이었다. 흔히 아는 사람만 말할 수 있는 음식이었고 어디를 좋아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내공을 짐작했다. 가장 대중적인 을밀대를 좋아한다고 하면 무시하고 육수가 가장 쨍한 을지면옥을 좋아하면 인정을 하는 시절도 있었다. 다 옛날 이야기가 됐다.
이제는 누구나 평뽕(평양냉면 마니아)를 자처한다. 미식가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의 취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내게 취향을 묻는다면 고민하지 않고 하나의 식당을 고르는데, 다름 아닌 우래옥이다.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건물 외벽 대비 내부는 노포가 주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내 나이보다 오래된 건물에서 냉면을 먹고 있자면 문득 그 짐작할 수 없는 역사에 스스로 숙연해진다.
우래옥 외관
우래옥은 평양에서 명월관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1946년에 차린 식당이다. 서울의 냉면 집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개업 직후에는 서북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했다. 6∙25전쟁으로 문을 다시 열고 우래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성업 중인 을지로의 대표적인 노포다. 누군가는 이 업장이 ‘어르신들의 아웃백’ 같다는 말도 했다. 백발의 성성한 노인들은 이곳에서 불고기에 냉면을 먹는다. 을지로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다. 고깃집에서 냉면은 조연이지만 우래옥에서는 당당한 주연이다.
우래옥의 평양냉면은 한우로 만든 말끔한 육수에 메밀과 전분의 비율이 적절한 면을 넣고 심심해 보이는 무생채와 김치를 고명으로 올린 형태다. 예전에는 쪽파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삶은 달걀도 없다. 구성은 심플한데 맛은 깊다. 육수는 육향이 강렬하지 않고 부드럽게 입에 감긴다. 휘발성이 없고 차곡차곡 혀에 풍미가 쌓인다. 면발은 치감에 충실하고 매끈하다. 이제는 순면(메밀100%)을 주문할 수 없지만 아쉬움이 없다. 기품은 의외로 김치에 있다. 젓갈의 향취가 없는데 감칠맛이 씹을수록 서서히 오른다. 그릇 속의 화룡점정이다.
냉면의 가장 큰 순기능은 해장이다. 조선의 왕들도 숙취에 냉면을 찾았을 만큼 검증된 해장법이다. 해장이 되는 음식은 곧 좋은 안주가 되기도 한다. 우래옥에 오면 남녀노소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여름의 더위를 스스로 이긴다. 역병의 시대를 보내며 폭염까지 덤으로 찾아와 국민들은 답답함을 토로한다. 여행도 힘들고 허심탄회한 술자리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 시원한 평양냉면이 건네는 위로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우래옥
주소 : 서울 중구 창경궁로 62-29
영업시간 : 매일 11시 30분 ~ 21시 30분
글. 미식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