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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2 에세이

2030의 오늘은 - 아이돌이 밥 먹여준다

2024.07.10

성인 여성이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은 으레 철없는 취미 생활 정도로 인식되게 마련이다. 손에 닿지도 못할 신기루 같은 존재를 위해 시간과 돈과 애정과 노력을 쏟는 팬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치기 시작하자 사회의 시선이 그나마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운동이나 독서 같은 다른 취미에 비해 비생산적이라는 인상이 확실히 짙다.

원래는 아이돌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누굴 봐도 무덤덤했지만, 어느 날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한 사람이 내 앞에 등장했다. 그를 가칭 A라고 하겠다. 처음에는 A가 속해 있는 ◯◯그룹의 노래가 좋아서 듣기 시작했다. 음악을 멤버들이 직접 만든다고 하니 더 관심이 갔다. 나는 그 음악의 리스너일 뿐이지, 팬은 아니라며 ‘입덕 부정기’를 거치던 시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A가 나온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화면 속의 그가 미소를 지을 때면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문득 내 광대뼈와 근육 움직임을 자각했고, 어쩔 수 없이 그의 팬이 되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A뿐만 아니라 ◯◯그룹 다른 멤버들의 매력도 발견하게 되면서 출연 프로그램들을 전부 찾아보고, 공개 방송과 콘서트에 가고, 음원 순위를 위해 그들의 노래를 스트리밍하는 본격 덕후로 발전했다.

얼마 후 팬 커뮤니티와 SNS에서 내 디자인 작업물이 화제가 되어 칭찬을 받게 되면서 덕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뿌듯한 와중에 ‘이 정도면 팔아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곧바로 ◯◯그룹의 팬 커뮤니티에 구매 의향을 묻는 글을 올려봤다. 굿즈를 팔아 달라,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속속 나타나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주문 건과 계좌 관리, 고객 응대 등을 맡을 팀원들이 구해졌다. 상품 기획과 디자인, 업체 콘택트, 생산, 홍보까지가 내 역할이 되었고,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공동구매를 주도하고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선주문 시작 3주 만에 매출 1500만 원을 돌파했으니 말이다. 디자인 시안과 샘플 사진을 올렸을 때에도 호응이 엄청났는데, 업체를 꼼꼼히 선정하고 퀄리티에 신경을 많이 썼더니 실제로 제품을 받아본 팬들의 만족도도 정말 높았다. 2차 공구를 열어 달라는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소속사에서 만든 공식 굿즈가 아닌 비공식 팬메이드 굿즈이고, 팬덤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그저 좋아서 했을 뿐인데

그 후 다른 상품으로 공동구매를 몇 번 더 열었다. 여러 번 하다 보니 상품 기획부터 판매까지 많은 것들을 자세하게 배울 수 있었다. 기획과 홍보 단계에서는 사람들의 선호를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혹시나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팬들에게 공유한 후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하기도 했다. ‘믿고 사는 공구팀 상품’이라는 입소문이 나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팬 커뮤니티에서도 구매 요청이 쇄도했다. 콘서트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판 물품들을 가지고 있는 팬들이 적지 않게 보일 정도였다. 내가 만들고 팔았지만 참 신기하고 뿌듯했다.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에서 오는 짜릿함 때문에 대학 생활과 취업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사실 판매 수익금이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수익금은 전액 팬덤에 기부해 팬 행사나 팝업 등에 활용되었다. 그저 사랑의 힘과 다른 팬들의 성원에서 오는 기쁨과 보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뿐 아니라 ‘내가 디자인하고 만든 상품이 사람들에게 팔리고, 심지어 잘 팔린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몇 년 후에는 창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내 사업을 하게 됐을 때를 대비해 ‘사업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임했다. 팬덤에 기여하는 동시에 내 사업 연습까지 한다니 일석이조 아닌가?

결과적으로, 덕질은 나에게 ‘밥을 먹여’주었다. 취업 준비 시즌, 학교의 채용 설명회에서 우연히 인연이 닿게 된 한 회사 대표와 만나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대학 생활 동안 가장 성공적이었던 일이 뭐냐고 묻자, 나는 아이돌 굿즈를 열성적으로 판매한 이야기를 했다. 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그는 곧바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이 모든 것은 아무 목적성 없이 즐거워서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덕질을 하며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고, 그 경험들은 나에게 엄청난 자기 효능감과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나의 가능성을 찾고 열정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그룹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항상 마음속으로 그들의 앞날을 응원하고 있다.

* ’사단법인 오늘은’의 아트퍼스트 에세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고 나누며 얻은 정서적 위로를, 자기 이야기로 꾹꾹 눌러 담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대중과 나누고자 합니다.


한수현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려고 하며, 진정성 있는 관계 속에서 빛을 발견합니다. 호기심과 진취적인 에너지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합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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