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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2 에세이

아직은 다정함을 말할 때 - 봄, 영화제, 영화의 길목에서

2024.07.10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스틸 © (주)디오시네마

글. 정지혜

5월을 맞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득해진다. ‘한 해가 다 갔다.’는 혼잣말이, 넋두리가 그저 말뿐이 아니라 목전까지, 코앞까지 닥쳐온 것만 같아 괜히 기분이 묘하다. 겨울을 지나고 초봄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프리랜서 영화 원고 노동자의 삶은 꽤 단조로웠다. 익숙한 듯 낯선 비수기. 여러모로 영화계도 경색 국면이라 봄이 올까 싶었는데 가까스로 찾아온 봄기운에 영화제들도 어렵사리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몸과 마음이 분주해지고 곤해졌다. 이 원고를 마치는 즉시 서둘러 전주행 기차에 올라야 한다. ‘~하는 와중에’, ‘~하는 도중에’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마는.

5월은 어김없이 전주국제영화제로 시작한다. 새로운 영화를 본다는 것도 있겠지만, 시기상, 절기상, 장소 특성상, 볕을 보고 즐기기에 이만한 때도 없다 싶어 그것이 이 여정의 큰 즐거움이다. 일의 특성상 대부분 극장에 있거나 다음 일을 준비하느라 정신없겠지만, 그래도 나만의 틈을 내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일과를 시작하기 전 홀로 고요한 아침 산책을 한다든지, 하나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비어 있다면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든지, 일과를 모두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 괜히 더 먼 길을 택해 밤공기를 마셔본다는지 하는 식이다. 그 짧은 순간 느끼는 볕, 공기, 바람이 달디달다. 누군가 내게 전주에서 영화제 기간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무엇이냐고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산책길과 잉여와 휴식, 배회의 시간을 말하겠다. 화려하고 거창한 무엇이 다 지나간 뒤에 혼자만의 고요함.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장면보다 의외로 이처럼 적요한 시간이 더 구체적으로 기억되고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는다.

물론 재능 있고 유능한 감독, 배우, 스태프들을 만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들은 그야말로 순간이다. 아주 짧은 만남이고 즐거운 이벤트다. 비상한 만남이지만 비일상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나의 삶과 접속했다기보다는 나의 어떤 시간대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달까. ‘아, 그래 이 만남(더 정확히는 이 일)은 애초부터 그런 유의 것이었지!’라며 나와 상대의 거리감을 확 인식하고 그것을 수긍할 때, 이상하게도 나는 눈이 더 번쩍 뜨이며 상대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조금 과장해 말해보자면, 모든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영화는 그런 것 같다. 낯선 거리감, 그로부터 비롯되는 수긍과 개안을 안겨주는 영화. 어떤 감독은 이러한 수긍과 개안의 순간을 관객에게 안기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도 같다. 이를테면, 하마구치 류스케. <열정>(2008), <아사코>(2019), <우연과 상상>(2022) 등에서 인물들이 잘해나가는가 싶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레 상대를(혹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를) 배반하는 순간이 있다.

관객인 우리는 한참 동안 주인공을 따라 감정을 이입하고 고양해왔는데 일순간 주인공이 해 보이는 배반 행위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된다. 그때 인물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확 느껴지는 것이다. ‘아, 저 인물과 나는 하나가 아니었지!’ 수긍하고 눈이 떠지며 스크린 속 주인공을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뿐인가. 영화 속 인물과 나, 스크린 속 세상과 극장 밖 세상 사이의 이질, 격차, 시차를 더 분명하게 느끼기도 한다. 영화와 현실이 아주 가까이 맞붙어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영화와 현실이 완전히 별개의 세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때, 바로 그 순간 영화의 리얼리티가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 <새벽의 모든> 스틸 © (주)디오시네마

알아채주고 지켜봐주며 살피는 사람들

그것이 사람이든, 영화든, 어떤 순간이든, 내 인식의 차원에서 수긍이 가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보는듯한 경험을 안겨줄 때, 마음이 서늘해지고 내 안에 뭔가 흔적이 남는 것만 같다. 하마구치의 영화의 결과 온기와는 다르지만,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새벽의 모든>(2024)을 연출한 미야케 쇼의 영화 역시 그런 수긍과 개안의 순간을 기꺼이 내준다. 그는 <와일드 투어>(2019),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20),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등으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동시대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성실하고 뛰어난 창작자다. 그는 거대하거나 거창한 이야기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영화의 막대한 매력은 아주 사소하고 소박하며 연약하고 미세한 것들, 그들의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들어내는 데 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대사를 빌려 말해보자면, “재능은 없지만 인간적인 기량이 있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사람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들의 세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새벽의 모든> 역시 이런 기대를 한껏 품게 만드는 작품이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된 영화는 세오 마이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한 달에 한 번 PMS(월경 전 증후군)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와 공황장애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 영화는 소설 속 두 인물과 그들의 상황을 가져와 이들이 각자의 어려움을 직면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둘 사이 관계의 변모, 그러니까 연인 관계로의 진척이라든지, 애정 전선을 그리는 데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영화다. 그보다는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증상과 그 발현을 섬세하게 알아채주고 지켜봐주며 살피는 인물들의 인간적 면모가 이 영화만의 특색이라 하겠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가 택한 설정이 있다면 인물들의 일터를 어린이 교재용 망원경, 현미경, 천체 관측 키트를 만드는 곳으로 설정한 점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우주와 별, 빛과 어둠, 밤과 새벽, 아침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영화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다. 그것은 별을 좇으며 가야 할 방향을 가늠했다는 고대인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와도 이어지고, 열정적으로 우주를 관찰하며 성실히 일했던 이 회사의 지난 역사와 누군가의 흔적과도 접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게 보자면 영화의 역사와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빛과 어둠 속에서 길을 내는 일, 그것은 곧 어둠의 극장에서 영화가 가고자 하는 길이기도 하니까. 운이 좋게도 전주에 내려오기 전, 미야케 쇼 감독과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가 품고 있는 영화에 관한 오랜 꿈, 무성영화를 비롯한 시네필로서의 영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글은 전주국제영화제가 발행하는 <J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로, 글로 우리는 어느 한순간 만난 것이다.

이 글을 보내고 나는 서둘러 전주국제영화제로 향할 것이다. 어떤 영화와 사람과 만나고 스치고 다음을 기약할까. 그사이 밤의 길목에서 홀로 마주할 무언의 시간은 또 어떻게 기억될까.


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에 관해 말하고 쓰며 영화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한다. 영화와 글쓰기, 그 사이에서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도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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