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빌런을 위한 영화는 없다 ― 슈퍼히어로의 정신 건강은 누가 챙기나 (1)'에서 이어집니다.

ⓒ <블랙 아담> 스틸컷
그렇다면 ‘블랙 아담’은 빌런 내지는 안타고니스트의 성격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었단 말인가.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지금 밝힐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무엇보다 DCEU의 다음 영화 소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블랙 아담이 안타고니스트일 수는 있어도 결코 빌런은 아니라는 점이다. 빌런을 안타고니스트의 자리에 배치하곤 했던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과 달리 <블랙 아담>은 블랙 아담을 다소 혼란스러운 위치에 배치한다.
기원전 2600년경 아프리카에 위치한 고대 도시 칸다크의 폭군 아크 톤 왕(마르완 켄자리)이 악마 사박을 소환해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왕관을 만든다. 이에 반기를 든 노예 출신 소년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나선다. 마법사 의회는 사박의 소환을 저지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소년에게 샤잠의 힘을 전수한다. 결과적으로 ‘블랙 아담’은 이 때문에 큰 트라우마에 사로잡힌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엄마’와 관련된 기억,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던 것과 달리 블랙 아담의 트라우마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블랙 아담이 인터갱이라는 현대의 독재 권력을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를 유사 아버지처럼 대하는 소년 아몬(보디 사봉귀) 덕분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멤버들은 <블랙 아담>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가. 존재감도 없고 이름도 헷갈리고 능력치가 뭐였는지도 혼란스러운 호크맨, 사이클론, 아톰 스매셔, 닥터 페이트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아만다 윌러를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을 뿐, 사박을 저지하는 데에도 블랙 아담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만다 윌러가 사박의 소환을 저지하는 블랙 아담을 ‘길들이기 위해’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멤버들을 투입시킨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블랙 아담의 힘이 슈퍼맨의 그것과 맞먹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팀을 내보냈어야 한다는 건 코믹스의 설정을 알고 있는 팬이 아니라면 인지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아만다 윌러는 블랙 아담에게 고대 도시 칸다크의 지역 경찰 역할만을 부여하지만 추후 블랙 아담은 DCEU 전체에 등장하거나 영향을 끼칠 캐릭터가 될 것은 분명하다.(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쿠키 영상에 담긴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아만다 윌러가 수족처럼 부리게 될 마음의 상처를 지닌 히어로가 한 명 더 늘어났을 뿐, ‘블랙 아담’은 빌런의 위치에 선 캐릭터는 아니고 안타고니스트로서의 기능 역시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영화 <블랙 아담>의 이야기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고, 등장하는 캐릭터 관계는 혼란스럽고, 이 캐릭터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진화하는 빌런과 지쳐가는 슈퍼히어로

ⓒ <블랙 아담> 스틸컷
이쯤 되니 마블과 DC를 막론하고 혼돈의 시대를 돌파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의 정신 건강은 대체 누가 챙기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세상을 구할 유일한 존재라 여겼던 이들이 그동안 무엇을 보상 받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신이 지닌 힘을 깨닫게 된 이후에 결국 자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거의 모든 현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같은 결말을 지니고 있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지난 몇 년 동안 박 터지게 싸워서 얻은 결론도 그것이다. MCU에 속한 모든 히어로들이 아이언맨이라는 큰 별을 잃고 흡사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도 그러하다.(대표적인 캐릭터가 피터 파커다.) 히어로들은 이제 한데 모일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덕분에 앞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 빌런들의 존재감과 파워는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어떨까

ⓒ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스틸컷
2022년이 지나기 전에 한국 극장가를 찾을 슈퍼히어로 영화로는 11월 9일 개봉하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가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의 모든 MCU 영화들이 그렇듯, 와칸다 왕국에 속해 있는 모두가 엄청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블랙 팬서 역을 맡았던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2020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나면서 마블의 향후 전략이 수정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와칸다의 왕이자 블랙 팬서인 트찰라의 장례식 혹은 추도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모양이다. 공개된 예고편에 따르면, 블랙 팬서의 부재로 인해 와칸다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오는 듯하다. MCU 세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광물인 비브라늄은 와칸다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물질인데 아마도 이를 원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게 되고 이는 중요한 갈등 요인이 될 것 같다. 와칸다의 수많은 부족들은 블랙 팬서의 부재로 인해 한데 모이지 못하고 이는 정치적 와해로 이어지거나 혹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와칸다에 큰 반감을 표하는 인물로 추정되는 캐릭터로는 탈로칸 왕국의 수장 네이머(테노크 휴에타)가 있다. 전편에 등장했던 트찰라의 동생 슈리(레티티아 라이트)가 2대 블랙 팬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역할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등장인물로 리리 윌리엄스(도미니크 손)도 캐스팅 리스트에 속해 있는데 많은 팬들은 그가 천재 공학도라서 아이언맨 슈트에 버금가는 슈트를 입고 등장하는 아이언하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아직은 모든 게 ‘뇌피셜’ 추측에 불과하지만,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이야기 전체는 어쩌면 트찰라의 부재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와칸다인들의 분투기가 될지 모른다.

ⓒ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스틸컷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예고편이 최초 공개된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MCU 페이즈 5의 시작점이 될 영화로서 향후 MCU의 새로운 빌런이 될 정복자 캉(조너선 메이저스)의 존재를 포스터 전면에 내세운다. 새로운 빌런을 성공시키는 영화가 곧 슈퍼히어로 영화계를 평정할 것이라 예견하는 듯하다.
앞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부모에 의해, 타노스에 의해, 세상을 떠난 히어로의 부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현재의 수퍼히어로들은 더욱 거대한 힘을 자랑하는 빌런들과 맞서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빌런과 안타고니스트의 밸런스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 될 것이다. 우주의 평화, 나아가 이제는 멀티버스의 평화까지 챙겨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으니, 세상의 모든 슈퍼히어로들에게 건투를 빈다.
글. 김현수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