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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7

사라져가는 것을 사랑하기

2023.09.19

ⓒ 사진제공. 녹색연합

얼마 전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우리나라 영화입니다. 갑작스러운 대지진과 이상기후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 아파트를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폐허가 된 도시에 홀로 솟은 황궁아파트 103동으로 생존자들이 몰려듭니다. 아파트 주민들은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민 대표를 뽑고 자경단을 조직합니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다’라는 규칙하에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받아준 주민들은 처벌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목숨을 건 치열한 경쟁 끝에 무너진 마트를 뒤져 생필품을 구하러 다닙니다. 재난 와중에 권력을 쥔 아파트 동대표는 점점 광기에 사로잡히고, 아파트는 작은 전체주의 사회로 치닫습니다.

영화는 제목과 달리 재난 후 ‘디스토피아’의 광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콘크리트)’는 재산과 계급의 상징입니다. 너도나도 이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콘크리트 아파트와 빌딩은 더 높아져갑니다. 그렇게 GDP(국민총생산) 곡선이 상승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행복해질 거라 믿습니다. 다른 것을 유보하고 포기해도 더 높은 층으로 오르면 행복해질 거라는 약속,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콘크리트 덩이가 높아질수록, 땅과의 격차는 커지고 그늘은 더 길게 드리웁니다. 성장을 지상 목표로 좇은 생산과 소비가 낳은 자원 남용과 쓰레기는 지구 생태계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기후 재난이 해마다 극심해져가는 요인입니다. 폭우로 반지하 방에 갇혀서, 냉방 시설도 쉬는 시간도 없는 일터에서 스러져간 이들이 있습니다. 이 재난에 가장 먼저 희생되는 이들은 불평등한 사다리 아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현실은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재난이 벌어진 자리에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데 무능하고 무책임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최근의 새만금 잼버리 사태까지 우리는 익히 경험했습니다. 시급한 기후위기 대응에 정부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위험한 핵 기술이 만능 해결책이라는 착각에 빠져 노후한 핵 발전소의 수명 연장, 신규 핵 발전소 건설 등 ‘핵 폭주’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80%가 반대하는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 투기도 용인합니다. 아직도 석탄 발전소가 건설 중이며, 신공항 건설과 국립공원 개발로 생태계는 무너지고 국토 곳곳이 파헤쳐집니다. 10년 전 실패한 국토 파괴 사업인 4대강 사업을 대놓고 되살리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부담은 줄어들지만, 인상된 대중교통 요금과 주택 비용으로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져갑니다. 게다가 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념 전쟁’까지 등장합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다양한 목소리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와 시민사회를 공격하고 탄압합니다. 하다 하다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에게마저 불온한 낙인을 찍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오랜 세월 조금씩 쌓아온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희망은 사랑에서 온다
현실이 영화보다 힘겨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그리고 무책임한 권력에 의해 사라지고 잃어버리는 것이 점점 늘어갑니다. 무력감과 슬픔, 상실감을 표하는 이들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고통과 슬픔은 잃은 것에 비례합니다. 잃어버리는 것이 소중한 만큼 슬픔과 상실감도 커집니다. 케이블카 공사에 파헤쳐지는 숲, 공항 건설을 위해 매립되는 갯벌, 기상이변으로 죽어가는 구상나무, 바닷물 온도 상승으로 사라지는 산호초, 폭염에 쓰러진 쪽방 주민, 폭우에 실종된 이웃. 이들이 소중한 만큼, 이들을 사랑하는 만큼, 아프고 슬픕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은 이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합니다.

결국 우리의 희망은 ‘사랑’으로부터 올지 모릅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주인공은 황궁아파트를 도망쳐 만난 이들에게서 환대를 경험합니다. 다른 세상, 다른 사회를 만납니다. 사랑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나 호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타인과 자연을 착취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하고 돌봐야 할 동료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유리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입니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이 사랑이 지금의 위기를 넘어 다른 세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입니다.

9월 23일, 기후정의를 위한 행진이 열립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수만 명이 함께할 것입니다. 기후위기로 잃은, 우리가 사랑한 존재들을 기억합시다. 소중한 걸 지키려는 ‘사랑’으로 광장에서 만납시다. 그 사랑이 있다면 분노하고 싸우면서도 회복과 창조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폐허 속에 홀로 남은 콘크리트 아파트에서 빠져나와 ‘사랑’으로 함께 걷는다면.

소개

황인철
녹색연합 기후에너지팀장


글. 황인철 | 사진제공.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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