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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4 인터뷰

'쪽프레스 김미래 편집장 ― 교열, 문장의 무늬를 찾아서 (1)

2023.03.04


'안녕하세요, 저는 책입니다. 제가 완성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치지만, 그중에서도 글의 품질을 결정짓는 데는 ‘교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독자들이 읽기 좋은 문장으로 다듬는 교열은 저‧역자의 요청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모든 글자를 본다는 점에서 책을 만드는 책임감의 다른 이름일 수 있지요. 글에 빛을 더한다는 건, 두 눈으로 문장의 무늬를 찾는 일과도 같은데, 마치 지금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듯 책을 읽다 좋은 기분을, 감정을 느꼈다면 분명, 그건 교열의 흔적일지 모릅니다.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일기 한 편, 편지 한 장, SNS에 짧은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내 문장이 가진 고유의 무늬를 찾아보세요. 분명 그 문장엔 스스로 문장을 갈고닦은 마음이 담겨 있을 거예요. 책의 여행, 여덟 번째 주인공으로 ‘한쪽(으로읽는)책’ 등 실험적인 도서들을 펴내는 출판사 쪽프레스의 김미래 편집장을 만나 교열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교열에 처음 관심을 갖게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는데요.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편집하면서 교열에 대한 직업의식이 쌓인 것 같아요. 여성 문학을 익숙하게 접하고는 있었지만, 오래된 문학에서 거의 동시대적으로 공감한 것은 직접 편집하고서였어요. 울프의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100년 전에 쓰인 글이 번역자를 통해 새로운 언어로 바뀌고, 편집자가 다듬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책도 작업자도 물리적으로 영향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교열이 단순히 책 제작에의 조력이 아니라 편집자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강렬한 체험이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죠.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나요?
<등대로>는 1927년 발표된 장편소설인데, 2013년 편집을 맡은 저는 ‘To the Lighthouse’보다는 ‘燈臺路’로 읽을 만큼 유독 예스럽게 다가왔어요.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의식이 비대한 아버지와 그를 내조하는 어머니, 그들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인데요. 등대를 보러 가자는 아이들의 청에 어머니는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라고 희망을 주고, 그다음 장에는 “하지만 날이 맑지 않을 게다.”라고 아버지가 그 희망을 우그러뜨리는 장면이 나와요. 이 장면은 일상적이지만 어린이가 세계에 던진 첫 제안이 아버지가 대표하는 세계로부터 튕긴 듯한 절망을 암시하는 대목이죠. 이때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도끼나 부지깽이, 아니면 아버지의 가슴에 구멍을 낼 수 있는 어떤 무기라도 가까이 있었다면,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그것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도끼와 부지깽이가 어린이 손에 쥐여 있지 않고요.

교열, 교정, 윤문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낱말의 한자를 보고 가늠해보자면 교정(校訂)은 문장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 교열(校閱)은 문장을 넘어 내용을 판단하는 것, 윤문(潤文)은 내용 이후의(혹은 이전의) 문예에 관여하는, 말 그대로 빛을 내는 일입니다. 편집 과정에서 이 세 가지가 정확히 구분되거나 순차적이지는 않아요. 교열과 윤문은 결국 문장의 질감이나 표면에 가해지는 작업인데, 번역서의 경우 역자와, 동시대 책이라면 저자와 소통하면서 그 강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교열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운동을 시작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능숙해지고 신장되는 것이 느껴지는데요. 교정교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없고 어렵게 느껴지는 듯해요. 누군가의 글을 바꾸거나 들여다본다는 게 인간관계만큼 미묘해서, 저·역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영향이라는 것은 결국 압력이란 것이고, 이를 받기 전의 사람과 글 자체가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죠. 그래서 교열 작업하기 전에 원하는 작업 강도나, 저자의 선호, 그간의 작업 방식에 대해 여쭤보곤 합니다.

그렇다면, 교열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하루에 30페이지를 교열할 때도 있고, 두세 페이지에서 그칠 때도 있거든요. 전속력 달리기가 아니고 산책하듯이 독서할 수 있으니 즐거워요. 또한 교열은 책이나 텍스트에 기여한다는 실용적인 기능 외에, 작업자에게 명상과도 같은 정신적인 훈련이 된다는 점이 좋습니다.

교열 워크숍을 열면 주로 어떤 분들이 참여하는지 궁금해요.
교열을 비롯한 독립출판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배운 건, 독자가 언제든지 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모두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역할을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스펙트럼에 놓여 있죠. 그리고 그 중간에 편집자라는 롤이 있어요. 독자에서 저자로 가는 길목에서 능동적인 독서 혹은 퇴고로서의 편집을 배우고 싶어 찾아주시는 것 같아요.

저자 혹은 편집자 지망생들에게 교열을 권하는 이유는요?
교열은 저자한테도 독자한테도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글에 대해 저자만큼 고민하는 상징적인 작업이고, 저자에게 잠재적인 독자가 생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작업이기도 하죠.

평소 문장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어사전 찾는 것을 추천해요. 글과 문장에 영어나 한자보다 우리말 단어가 많을수록 흐름이 좋다고 생각해요. 글을 읽는 것을 걷기라고 상상해보면, 외국어는 산책길에 있는 눈에 띄는 상점이나 동물이고, 우리말은 산책자가 스쳐 지나가는 ‘햇살’이나 ‘바람’ 같은 요소예요. 사전은 쓰려는 낱말의 본뜻을 알려주면서도, 충분히 대신할 만한 우리말 뭉치를 제공해줍니다.

이 글은 ''쪽프레스 김미래 편집장 ― 교열, 문장의 무늬를 찾아서 (2)'로 이어집니다.


글. 정규환
에디터, 작가. 2023년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까 고민하고 있다. @kh.inspiration
사진. 이규연
바쁜 일상 속 반짝이는 찰나를 담는 사진작가. 편안하고 차분한 사진을 좋아하고,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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