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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당신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얼어붙는 거예요 (1)'에서 이어집니다.
입만 살았거나, 입이 싸거나
학부 시절 심리학 공부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제가 유독 이 사건에 크게 반응한다는 걸 알고 분노 버튼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80년대에 태어나 남성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네가 아들이라고 해서 안 지우고 낳았는데 의사한테 속았다.” 같은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왔고 이름 대신 ‘쓸데없는 가시나’라는 호칭을 부모로부터 들었죠(화가 났을 때 호칭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르던 표현이었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말대꾸를 한다면서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만난 사회의 어른들은 대부분 중년 남성들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중년 남성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 역할을 대부분 맡고 있으니까요.
특히 아버지는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아냥거릴 포인트를 끄집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대화는 제가 화를 참지 못하고 울거나 한숨을 쉬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걸로 끝이 났죠. 경상도 출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에겐 ‘입만 살았다’고 하고 말수가 많으면 ‘입이 싸다’고 할 정도로 화술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거든요. 그러다 가끔 입을 열면 그간 못한 걸 벌충하듯 표현을 극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 아까 나 못 봤어?”라고 하면 될 걸 “니 내 쌩까나?(니 내 무시하나?)”라고 하는 식이죠. 원체 억양도 강한 편인데 내용까지 세니 타격감이 큽니다. 타 지역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과 대화하면 이 사람이 지금 싸움을 거는 건가 당혹스러워질 때가 많다고 토로하곤 하죠. 정치인 홍준표가 장인어른을 ‘영감탱이’라고 불렀다가 패륜 논란이 일자 경상도에선 이 말이 장인을 친근하게 표현하는 말이라 반박한 건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만은 이해될 수 있는 변명입니다. 저는 그걸 ‘경상도식 충격 요법의 언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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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된 후로 저는 집 안에서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말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까만 리본이 달린 3센티 굽의 까만 구두를 신고 갔다가 중년 남성인 학생주임에게 압수당한 적이 있어요. 새 구두를 신고 간 게 아니라 전부터 신던 거였는데도요. 그는 학칙 어디에 장식 달린 구두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제 말에 ‘선생한테 말대꾸한다’며 뺨을 때리고 복도에서 엎드리게 한 뒤 긴 방망이로 엉덩이를 연신 내리쳤죠. 대학 때 대다수를 차지하던 중년의 남성 교수들은 발표를 시켜놓고 지루하다는 표정을 연신 지어 보인 적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어요. 금방이라도 하품을 할 것 같은 표정을 보면 이런 말풍선이 뜨는 듯했고요. “네 말은 지루해. 네 이야기에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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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려운, 중년 남성과 말하기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동성이든 이성이든 친구들 사이에서는 수다스러운 사람이었고, 연애할 땐 대화가 잘 통하는 걸 중시할 정도로 애인과도 그랬죠.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불편해했던 거라고 하기엔 여성 교수님이나 여성 상사 앞에서 말하는 건 두렵지 않았어요. 제가 힘들어하는 상황은 중년 남성 앞에서 말해야 하는 경우였습니다. 그 앞에서 제가 유독 얼어붙는 이유는 그들과는 긍정적인 교감을 했던 기억 자체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일단 경직되기부터 했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해 중년 남성들이 리더인 상황 속에서 그들이 제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무시한다고만 느껴왔으니까요. 굴욕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중년 남자들은 무서워.’ ‘중년 남자들이랑은 말이 안 통해.’라는 편견이 제 안에서 공고해진 것이죠.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중요한 자리만 가면 과도하게 긴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자리여서 긴장한 게 아니라 중년 남성들 앞에서 말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후 저는 그동안 어려워했던 상사 앞에서도 말하는 게 덜 힘들어졌어요. 신기하지요? 상황 그 자체는 바뀐 게 없는데, 힘들어하는 맥락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나자 훨씬 감당할 만한 일이 되었다는 게요. 중년 남성을 만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판단을 지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이 생각을 또 하고 있구나, 하고 매번 알아차릴 수도 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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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저는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중년 남자 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평소 잘 접하지 않는 인간 군상은 몇몇만 보고 편견과 오해를 쌓기 쉽잖아요. 하지만 경험치가 많으면 그들을 어떤 공통점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개별적으로 바라보게 되거든요. 예컨대, 한 팀에 서울대 출신이 세 명 이상이라면 그들 개인의 특성은 서울대생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서울대 출신이 한 명이라면 그의 개성은 서울대생으로 요약 축소되어 평가되곤 합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많은 사람은 주변에 아는 여성이 별로 없고 연애 경험이 적은 경우가 많습니다.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연애를 더 빨리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여성에 대한 환상이 없어서 여자를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보기 때문일 겁니다.
사진을 배우려던 차였기 때문에 문화센터에서 강좌를 고를 때 일부러 중년 남성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전이었다면 일부러 여성 선생님을 택했을 거예요. 그 수업이 끝나고 또 다른 중년 남성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죠. 문화센터 수업은 대학에서처럼 권위적인 모습을 강사가 보일 수도 없고 회사에서처럼 평가가 기반인 것도 아니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지요. 그런 식으로 1년 넘게 각기 다른 중년 남성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함께 현장실습도 나가고, 전시도 준비하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눌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의 경험이 이 부류를 만나면 일단 얼어붙는 걸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남성 팀장이나 대표님을 보더라도 점차 평소처럼 행동하게 되었는데 그들도 그걸 알아차린 것 같았어요. 그때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신기했는데 후에 후배들을 많이 대하며 알았습니다. 저를 어려워하는 후배는 티가 나서 모를 수가 없더군요. 그 후배가 불편할까 봐 저도 먼저 다가가기 어려웠죠. 나를 개별적인 인간으로 대하는지, 특정 이미지로 대하는지는 상대도 금세 알아차립니다.
스스로 말을 못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유독 어떤 상황에서 말하기가 어렵게 느껴지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가족끼리는 대화하는 게 편한데 친구와는 어려운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남성 상사는 편한데 여성 상사에겐 유독 어려운 경우가 있고 그 반대도 있죠. 자기표현이 어려운 상황에서의 경험만 강렬하게 기억하기에 그걸 근거로 ‘나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그런 이라 해도 편안한 환경 속에서는 술술 말하기 마련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말을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정 환경에서 얼어붙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경직시키는 상황의 특징을 찾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그걸 알아내면 두려움 없이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 준비된답니다.
글. 정문정
일러스트. 최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