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공원 벤치의 팔걸이가 왜 그렇게도 불편하게 생겼는지. 서울역 지하보도의 몇몇 사람들은 왜 그 자리를 그렇게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는지. 그저 ‘팔걸이가 불편하지만 어쩌겠어’ 라고 여겨왔다. 부끄럽게도, 어린 시절 나는 그랬다.
-아무도 그의 도둑질을 비난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온 동기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의 일이다. 같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우리는 종종 주변 공간 디자인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날도 비슷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던 중, 친구는 영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으로 현지 마트에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 홈리스 남성이 가게에서 식료품을 훔치다 들켰지만, 현장에 있던 그 누구도 남성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 끼 식사를 걱정하며 빵을 훔치게 될 정도로 그를 배척한사회 구조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내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우리는 과연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어떤 시선을 보내왔을까.

-벤치 위의 ‘작은’ 설계, 그 이면의 ‘커다란’ 배제
적대적 디자인(hostile design)은 공공 공간에서 특정 계층의 이용을 제한하거나 배제하기 위해 고안된 설계 방식이다. 차단봉과 입간판, 표지판 등이 넓은 범위로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팔걸이가 설치된 벤치가 주된 예시로 존재한다. 이는 사람들이 벤치 위에 눕지 못하도록 의도된 구조다. 벤치에서 고단한 몸을 뉘이던 홈리스는 자연스럽게 그 팔걸이의 과녁으로 서게 된다.
지난 2017년 영국 본머스 시 의회는 거리의 벤치 중간에 팔걸이를 설치했다. 공식적인 목적은 '하루 종일 누워있는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곧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팔걸이 제거를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는 약 2만 명이 서명했다. 많은이들이 그 팔걸이를 '비인간적이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방식의 디자인’이라고 비판했다.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는 허상
비슷한 디자인의 벤치는 도시 곳곳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울 시내 벤치 중 상당수가 팔걸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홈리스의 노숙을 제한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2022년 서울역 지하 벽면에는 ‘엘리베이터 내/외부에 대소변을 보는 노숙인을 발견시 신고하라’는 문구가 붙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해당 문구는 홈리스 혐오를 조장하고 낙인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공공질서를 위한 조치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거 취약 계층을 더욱 고립시키는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었다.
공공 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공간’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일부를 배제한 채 설계된 공간은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우리 사회가 말하는 ‘모두’에는 홈리스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진정 모두를 위한 공간은 우리 사회 안에서 아직까지는 허상으로 존재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마주한 두 얼굴
서울 영등포. 초고층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영등포 근린공원. 푸르고 풍성한 조경은 아름답고, 어린이 놀이터는 활기로 가득하다. 얼핏 보기에 공원은 모두를 위한 공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원을 채운 수십 개의 벤치는 그렇지 않았다. 의자 대부분에 팔걸이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구조는 누군가가 잠시 몸을 뉘는 것을 명확히 거부하고 있었다. 놀랄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앉아 즐겁게 웃고 휴식을 누리는 공간. 그 벤치의 팔걸이는 아주 작지만, 명백히 ‘차갑다’고 느꼈기에. 이것 또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차가운 설계였다.

공원 내의 표지판 속 ‘소음이나 악취 등으로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지 마세요’ 라는 문구 역시 그랬다. 해당 문구는 청결에 관련된 기본적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이들을 얼마든 공공의 공간 밖으로 배척할 수 있을만한 이유로 존재한다. 이 짧은 한 줄의 문구는 마땅히 씻을 곳을 찾지 못한 거주 취약계층을 공원에서 천천히, 그리나 명백히 밀어내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고단함은, 표지판 속에서 단지 ‘혐오감’이라는 단어로 정의되고 있었다.
해당 공원은 영등포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간이며, 동시에 영등포는 서울 내 홈리스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기도 하다. 거리의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공공의 공간이 이런 모습이라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눈부신 도시의 풍경 아래, 배제된 이들의 자리는 철저히 계산된 구조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이 적대적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빅이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었다. 영등포에 위치한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 근처. 그곳을 찾는 홈리스들에게 빅이슈는 빅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한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줄 첫 번째 제안.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용기를 내기 위한 첫 걸음. 그 걸음이 모여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높은 빌딩 숲 속의 냉담한 도시 설계 속에서도 빅이슈는 ‘사람’을 중심에 둔 가능성을 건네고 있었다.
-도시가 지워버린 존재들
공공 디자인은 단순한 설계가 아니다. 이는 도시가 어떤 철학으로 설계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표다. 누구를 환대하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더는 침묵할 수 없다. 홈리스 문제는 개인의 불운이나 게으름으로 환원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언제나 경제적·사회적 위기로 인해 주거를 상실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적대적 디자인은 사회에 만연한 그 가능성을 보이지 않게 숨기고, 위기에 처한 존재를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가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있는가
디자인은 사회의 윤리를 반영한다. 공간을 설계하고 디자인 할 때, 우리는 단지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사회의 커다란 방향성을 함께 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 방향이 진정으로 모두를 포용하고 있는지, 따뜻한 시선이 향하고 있는지. 설마 누군가를 지우고 배제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은 그러한 디테일 속에 담겨 있다.
홈리스의 도둑질을 비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벤치의 팔걸이를 비판하고 목소리를 모았다. 그 벤치 중앙의 팔걸이 하나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도시는 과연 누구의 편인가. 또, ‘우리’에 포함되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 범주를 넓혀가는 일에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야할 때 라고, 고작 팔걸이 하나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글: 빅이슈코리아 임팩트 기자단 1기 황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