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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7 에세이

듣는 사람

2024.04.26

글. 유지영

최근 몇 년 동안은 듣는 일에 관한 에세이 책을 쓰고 있다. 이 책의 관찰 대상은 주로 ‘남의 말을 듣는 나’로, 나를 관찰해 쓰면 그만이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작업이 길어지다 보니 필연적으로 남의 말을 듣는 남에게로 시선이 향하게 됐다. 타인은 타인의 말을 과연 어떻게 들을까.

흥미로운 건 어떤 사람이 말할 때만큼이나,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에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감하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행동 등 어쩌면 (음성언어가 아닌) 침묵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듣는 일이 그 사람을 설명할 때가 있다.

2024년 들어 이를 절감한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한 번은 지난 2월 16일 카이스트(대전 한국과학기술원) 졸업식장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 현장에서였다. 이날은 모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행사 참석자 중 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비판을 가하자 대통령경호처 경호원들이 참석자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어냈다. 한 달 간격으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카이스트 졸업식장에서는 경호원들 여러 명이 몰려들어 아예 사지를 번쩍 들고 졸업식장 밖으로 들고 날랐다.

이들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어떤 위해 행동을 한 걸까? 카이스트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신민기 씨는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R&D(연구개발) 예산을 복원해달라.”라고 외쳤고,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장에서 전주시을을 지역구로 둔 강성희 국회의원은 “국정 기조를 바꿔야 한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말은 거기서 채 이어지지 못하고 막혀버렸다.

이후 행사는 어떤 일도 없었다는 듯 무감하게 진행됐고, 이 사건은 인터넷상에서 영상을 통해 접한 이들에게 먼저 충격을 안겼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이 오늘(16일) 오후 참석한 카이스트 학위 수여식에서 소란이 있었다. 대통령경호처는 경호 구역 내에서의 경호 안전 확보 및 행사장 질서 확립을 위해 소란 행위자를 분리 조치했다.”라는 입장을 밝혔고, 그 이전에는 “경호상 위해 행위로 판단해 퇴장 조치한 것”이라 밝혔다.

소란 행위자만 남은 현실

이들이 행사의 주인공이기도 한 졸업생이고 국회의원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주권자이기도 한 국민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비판을 했다는 사실은 모두 지워지고 오로지 ‘소란 행위자’만이 남았다. 언론에서는 이들의 당적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마치 이들이 불순한 주장을 하는 양 뒤집어씌웠다. 이들은 적어도 이날만큼은 국민이 아닌, 소속 정당인 녹색정의당과 진보당에서 온 소란 행위자들이 돼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들의 발언을 듣고 행사장 밖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 조금 더 멋진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R&D 예산 삭감이 국정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결정이었다면,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자신의 국정 철학을 홍보하는 자리로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날 향한 곳은 정부의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커다란 타격을 받을 ‘대학’이었다. 또한 국정 기조를 바꾸라는 말에는 무엇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 말을 듣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는 대통령 경호원에 의해 끌려 나가는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계속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년 차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분명 충격적이나 돌이켜보면 예정된 수순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초와는 다르게 점점 국민들의 쓴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무엇보다 언론과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가진 뒤로는 그 후 단 한 차례의 기자회견도 갖지 않았다. 격식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진행하기 위해 도입된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회견)은 중단되더니 그 이후로는 통 재개한다는 소식이 없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언론에 2024년을 맞아 신년 기자회견을 고민한다면서도 “소통, 수준이 되는 언론과 대화하고 싶다.”라는 날것의 반응을 표출했다. 그 결과 대통령실이 선택한 ‘소통, 수준이 되는 언론’은 이른바 ‘낙하산 사장’으로 내부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KBS였다. 더군다나 KBS와는 생중계도 아닌 녹화로 대담을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은 또다시 큰 비판을 마주해야 했다. 녹화라면 대담이 편집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 편집은 대체 누가 어떻게 하나? 한 보수 일간지는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대담에 빈손으로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찍이 관계자들의 우려에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하고 국민과 소통을 늘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무리해서 옮겼으나 이제는 입맛에 맞는 이들하고만 대화하겠다고 한다. 용산 이전 비용은 대통령실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훌쩍 웃돌아 계속 늘어난다. 대통령실 이전에 따르는 여파는 2024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과연 대통령의 권위를 내려놓고 국민의 말을 들어보려 시도하는 대통령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곧 대통령의 임기는 반환점을 돈다.

[소개]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함께 만들고 동명의 책을 썼다. 사람 하나, 개 하나랑 서울에서 살고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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