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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8 커버스토리

COVER STORY- 어바등(3) - 심해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

2024.05.07

이 글은 'COVER STORY- 어바등(2) - 어둡고 푸르른 곳으로부터 '에서 이어집니다.

팬이 쓰는 <어바등> 리뷰

무분별한 개발로 빙하가 다 녹아버리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이 사라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인류가 최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지은 해저 기지에 물이 새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런 재난물에서는 보통 의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기가 되지만, 주인공 박무현은 불행하게도 치과 의사다. 게다가 그에겐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에게 흔히 부여되는 능력조차 없다. 어둠뿐인 해저 3000m.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박무현이 기진 무기는 과연 무엇일까. 팬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바등>에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글. 부야오 | 이미지제공. 어드

* 해당 이미지는 팬아터 어드 님의 팬아트 이미지로 <어바등> 공식 일러스트가 아닙니다.

0만 년 전, 지구를 휩쓴 마지막 빙하기를 살아가던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를 떠올려보자. 추위는 가혹했고,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뒤덮여 살 곳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수많은 동식물이 죽어나가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검치호랑이 같은 위협적인 포식자와 맞서 싸우면서 그들보다 지능이 높고, 힘도 더 센 다른 인류종들과 경쟁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빙하기가 끝난 뒤, 생존에 성공한 인류종은 호모사피엔스가 유일하다. 가장 평범했던 이 인류종의 생존 비결은 무엇일까? 2021년 출간된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디플롯 펴냄)의 저자 브라이언 헤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정함’을 제시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여러모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서로를 보살피는 능력이 가장 뛰어났고, 그렇게 이룩한 공동체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무기가 되었다. 서로에 대한 다정함으로 그들은 살아남았다. 다정함이 곧 생존의 가장 큰 무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2021년부터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에서 연재를 시작한 <어바등>이다.

“3000m 아래 해저 기지에 입사한 지 닷새 만에 물이 샌다고?”
‒ <어바등> 작품 소개 중


<어바등>을 딱 한 가지 키워드로 표현하자면 ‘재난물’일 것이다. 때는 21세기 말, 다가올 근미래는 우리의 머나먼 조상이 살던 10만 년 전 만큼이나 암울하다. 무분별한 개발로 결국 빙하는 다 녹아버렸고, 지구상의 생물 대부분이 멸종했다. 흔하디흔하던 먹을거리는 턱없이 부족해졌고, 지구의 기후 조절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탓에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새로운 도피처를 물색하던 인류가 마지막으로 눈을 돌린 곳은 바로 바닷속 깊은 곳, 심해다. 인간은 최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해저 기지를 짓고 그곳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이미 이러한 상황 자체가 끔찍한 재난이지만, 진짜 재난은 이 해저 기지에 물이 새기 시작하면서 벌어진다.
소설의 주인공 박무현은 평범한 치과 의사다. 우연히 해저 기지에 입사한 그는 이곳의 지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갑자기 발생한 재난에 떠밀린다. 그의 목표는 하나. 생존. 그리고 탈출. 그러나 이 목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몇 척 있지도 않은 탈출정은 이미 고장 나버렸고, 해저 기지와 지상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엘리베이터는 막혀버린 상태. 힘을 모으면 해저 기지의 붕괴를 막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총으로 무장한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들이 나타나 무차별적 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끔찍한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심지어 박무현에게 닥친 ‘진짜 재난’은 겨우 이런 것 따위가 아니다. 독자들은 제62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박무현에게 발생한 진짜 재난을 목도하게 된다. (<어바등>을 읽는 모든 독자가 비명을 지르는 구간이자, 해저 기지를 둘러싼 끔찍하고 기괴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보통 이런 재난물에서 의사의 존재는 구세주와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무현은 하필 치과 의사다. 작중 그의 고백처럼 ‘유니트 체어에 얌전하게 누운 환자들 앞에서만 무적’인 존재인 탓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들 앞에선 그 역시 그저 무력하기만 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처럼. 이렇듯 강인한 신체를 지닌 것도 아니고, 특출한 생존 스킬도 없으며, 판타지 소설 주인공에게 흔히 부여되는 엄청난 능력조차 없는 박무현이, 이 무시무시한 해저 기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하다면 사람들이 선한 행동들을 통해 서로를 돌보고 도왔으면 좋겠다. 나는 선의의 순환을 원한다.”
‒ <어바등> 제92화 중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박무현이 선택한 것은 ‘선의’다. 그는 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혹시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염려하며 물길을 헤치고 복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다. 생존에 도움이 될 법한 도구들 대신 우연히 발견한 고양이와 뱀을 가방 속에 넣어 보호한다. 인트라넷에 올라온 구조 요청 글에 응답하고, 다친 동료를 부축해 4000개의 계단을 오른다. 자신이 가진 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가지고 있는 물과 음식을 기꺼이 나눈다. 그는 추악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에게까지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몇 줄로 요약하는 것이 미안할 만큼 그의 선의는 이어진다. 작품 내내, 끊임없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만 같은 순간에도.
어떤 이들에게 박무현의 행동은 어리석고 바보 같은 행동일 것이다. 박무현은 어리석게 보일 만큼 무식하게 다정함과 선의를 이어간다. 왜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위기에 처한 해저 기지에서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유는 자명하다. 박무현이 진정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끊임없이 차오르는 물이나 고장 난 엘리베이터, 총을 든 사이비 종교 광신도들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닥친 진정한 재난은 인간의 이기심 그 자체다. 인간의 이기심 앞에선 생존 스킬도, 놀라운 능력도 아무 소용 없다.

“세상이 너무나 어둡고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심해의 바다를 떠올린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심해의 바다는 어둡지 않다. 거기엔 빛을 품은 생물들이 서로 발광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제 심해를 안다.”
‒ <어바등> 제389화 중


당연하게도, 해저 기지는 인류가 이루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우리 사회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다르지 않다. 해저 기지에 물이 새기 이전부터 이곳엔 인종에 대한 차별, 약자에 대한 폭력,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고 있었다. 힘든 육체노동이 인종별로 다르게 배정되고,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들의 폭력에 고통받는다. 소수자들은 공공연하게 조롱당하며 혐오의 대상이 된다. 누수 이전에도 이미 크고 작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점차 심해지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폭력의 강도는 높아져만 간다. 그리고 결국 전쟁이나 다름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이득을 보는 이들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쌓이고 쌓여 결국 차가운 바닷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던 해저 기지를 무너뜨린다. 서로를 도와 이미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 노력하지 않는 사회의 마지막은 결국 무너져버린 해저 기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박무현은 그 누구보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쥔 주인공이 된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갈등과 혐오에 맞설 수 있는 건 서로를 향한 다정함과 선의다. 그것들이야말로 갈라진 사회를 규합해 가혹한 환경을 버틸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그리고 2024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바등>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통해 선의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직접 확인하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다정해지자. 서로를 돌보자.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이 되자. 10만 년 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호모사피엔스들이 그러했듯, 선의의 순환만이 이 깊은 해저 기지를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이므로.

부야오
이것저것 보고 리뷰하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트위터리안입니다.

이 글은 'COVER STORY- 어바등(4) - 나의 해저 기지 등불캐'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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