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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6 인터뷰

숲의 아이는 청록색 토끼를 쫓는다 1

2020.10.19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아파트 화단의 나무들과는 제 베개만큼이나 친해요. 초등학교 등굣길에서부터 지금의 퇴근길까지 전부 알고 지냈거든요. 그 길목에서 책이나 의자는 되지 않겠다고 버티며 항상 같은 자리에 서서는 꼼짝달싹 않아요. 나무들의 고집은 여름날 안개비 내릴 때 제일 심해요. 푸른빛은 하늘빛과 풀빛이 같을 때 가장 선명하더군요. 이때 나무의 푸르름은 믿음직스럽게 짙어요. 제게 숲이 꼭 장소를 뜻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친구와 전 별별 이야기를 다 해요. 오늘은 저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사는 혜진이를 만나러 갑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다 2호선으로 환승해 합정역에서 내려요. 혜진이 방의 벽지도 파랑과 초록의 중간인 연옥색인데, 우연일까요?

예전엔 친구라는 이름은 왠지 소중하면서도 불안함도 동시에 주는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었잖아?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심연에 빠질 때, 나를 붙잡아 뭍으로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 친구는 나를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어. 어느 때에는 친구 때문에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친구를 사귈 때는 득실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같아. 어릴 적엔 아무 때나 놀이터에 가면 낯선 아이도 쉽게 사귀어 친구가 됐던 것 같은데. “너도 이 만화 봐?” 하면서 금세 친해지곤 했었지. 지금은 열정을 나눠 쓰는 방법을 알아서 글이나 음악, 그림 등 여러 가지로 향하지만, 어릴 때는 하나에만 몰두하는 시기가 많았던 것 같아. 그런데도 나는 스스로 끈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아직도 천성은 나태하지만, 게으른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게 괴로워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것 같아.
일 없이 두 달을 이 집에서 쉬었을 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표를 만들었어. 사소한 일들 있잖아. 일어나기, 침대에서 나오기, 양치하기, 아침밥 먹기, 커피 내리기, 설거지하기, 그리고 식물에 물 주기. 내가 완수해야 하는 작은 의무들을 마커 펜으로 그어가며 내 일상을 건설했어. 하나 라도 지키지 못하면 키우는 식물에 물을 주지 못하니까, 걔네를 위해서라도 해내야 하는 거야. 내가 식물들을 살리고 있지만, 동시에 식물들이 나를 살리고 있기도 하네.

생명도 집도 돌봐야 한다는 점에서 닮은 것 같아.
식물들을 보며 배우는 게 많아. 해를 향해 뻗는 행위가 자기에게 무엇이 좋은지 아는 것 같고. 저 덩굴식물은 벽에 살짝 붙어 있는데, 새 가지가 나더니 길이 막히니까 꺾어 올라가며 자라더라고. 주어진 공간에 자신을 맞추는 유연성을 가진 거잖아. 라벤더 같은 허브 식물은 가만히 두면 모르는데 만지면 향기가 나. 사람도 그렇잖아. 스치기만 하면 전혀 모를 상대도, 대화해보면 향기가 나는지 악취가 나는지 알 수 있지.

전에도 혜진이는 자신이 식물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해줬었지.
해와 물이 필요하다는 점만 봐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계절에 민감한 것도. 키우는 식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오렌지 재스민인데, 동질감을 느껴. 처음 이곳에 입주해서 마음이 너무 힘들고 일을 시작하지 않아서 괴롭고, 내가 너무 연하고 물러 단단해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때마침 오렌지 재스민 줄기가 나무줄기로 굳어지는 과정을 봤어. 그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이 친구와 같은 속도로 굳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얘는 꽃이 피는 속도가 매우 더뎌. 꽃대가 풍성해도 떨어지는 것이 많아서 끝내 피는 건 고작 서너 송이뿐인데, 내가 가끔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 같아. 나는 아주 무르고 연한 줄기를 가진 식물이지만 계속 물을 마시고 해를 보다 보면, 언젠간 이 친구처럼 작은 나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보면 오렌지 재스민이, 이 친구를 보면 내가 생각났으면 좋겠어.

네게 해와 물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아침밥을 먹는 게 내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이자 나를 돌보는 거야. 좋은 음악과 친구들이 전해주는 좋은 말들. 내게 파랑새처럼 날아들었다가 쓱 하고 사라질 때도 있지만, 가끔씩 내 가슴 안에 둥지를 틀고 살 때가 있어. 이런 것들이 내게 감사한 양분이지.

앨리스(Alice)라는 아이디를 즐겨 쓰는 것 같던데, 유튜브 채널명도 Aliceinnutshell이잖아. 무슨 뜻이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쫓다가 토끼 굴에 빠지잖아. 그 공간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었고. 난 아주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어. 열아홉 살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었고, 그때 스스로 지은 영어 이름이 앨리스야. ‘nutshell(견과의 껍질)’은 내가 2년째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의 제목인데, ‘in nutshell’은 숙어로 ‘간결하게 말하다’라는 뜻이야.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사람들이 이걸 보고 짐작해주길 바랐어.

※ 본 인터뷰는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조은식
소개말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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