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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2 인터뷰

<이장> 정승오 감독 & 배우 장리우∙공민정

2020.03.06 | 종언을 고하러 가는 길

정승오 감독은 장편 데뷔작 <이장>으로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다소 과해 보일 수도 있는 이 상찬에서 한국의 전형적인 가족을 해부하면서도 따뜻한 시선과 날카로운 접근을 잃지 않은 <이장>의 매력을 알 수 있다. 배우 장리우와 공민정은 <이장>에서 책임감 넘치는 한국형 장녀의 전형 혜영과 샌드위치처럼 끼어 기 센 남매들 사이의 윤활유가 되어주는 셋째 금희를 실감나게 연기한다.


아버지의 묘를 강제 이장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다섯 남매의 이야기가 특색 있다. <이장>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정승오 제사라는 건 누군가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의미 있는 의식인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차별을 받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보통 차별을 받는 건 가족 내 여성들이다. '차별을 둘러싼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게 된 영화다.

핵심이 되는 오 남매를 연기한 다섯 배우와 승락의 전 여자친구 송희준(윤화 역), 큰댁의 유순웅과 강선숙, 혜영의 아들을 연기한 강민준(동민 역) 등 배우들의 합이 좋다.
정승오 장리우 배우는 <고갈>(2008년작)이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보고 마음에 뒀고, 공민정 배우는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자주 나와 알고 있었다. 특히 형슬우 감독의 <병구>(2015년작)에서도 약간 얄밉지만 러블리한 느낌으로 출연해 <이장>의 캐릭터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나서 연기하게 될 캐릭터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장리우 그 전에 정승오 감독님의 단편영화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년)을 함께했다. <이장>의 바탕이 되는 영화인데, 거기서도 '혜영'을 연기했다.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보내줬을 때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결정되고 나서 감독님께 "왜 내가 혜영을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했다. 감독님은 "그냥 혜영 같아요."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갔고, 내 연기에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나름대로 감독님이 캐스팅한 그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나를 믿어준 감독님에게 고맙다.

공민정 먼저 시나리오부터 받아봤다. 일단 내용이 재밌었다. 또 네 자매 언니들과 하는 작업이라 재밌을 거 같았다. 캐릭터는 금희 아니면 혜연을 할 거 같았다. 초반에도 혜연이가 누구냐고 물어봤다. 두 캐릭터 다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희라고 해서 금희에 몰빵했다.(웃음)

혜영과 금희는 어떤 인물인가.
공민정 금희는 평화주의자고 갈등을 중재하는 인물이다. 자기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현실적으로 돈 500만 원이 필요하다. 언니들이 말이라도 예쁘게 해줬다면 신경질이 안 났을 거 같은데 서운하게 만들었다. 건들지만 않으면 중립을 지키는 인물이다.

장리우 이장을 하러 가지만 혜영은 본인의 문제가 더 크다. 싱글 맘인데 아들에게 일종의 병이 있고, 회사에선 육아휴직 후 사직이 예정돼 있다.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잠식해서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정말 하기 싫은데 첫째라는 이름 때문에 동생들을 모아야 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조율을 잘했을 테지만 자신도 불안하기 때문에 오히려 동생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답답한 마음이 이상하게 삐져나온다.


금옥과 금희, 혜영과 혜연이 유사해 보인다. 이름도 그렇지만 금옥과 금희는 각각 결혼으로 인한 문제에 처해 있다. 금옥은 남편이 바람 피우는 장면을 포착하고, 금희는 결혼을 앞두고 돈 문제로 고민한다. 혜영과 혜연은 싱글 맘과 페미니스트 대학생으로 상황은 다르지만 터프한 성격에 큰아버지의 장남 선호의 발언에 참지 않고 반기를 든다.
정승오 이름은 내가 모델로 삼은 오 남매에게서 가져왔다. 첫째 혜영은 장남의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사실상 장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음속엔 불만이 있고, 하고 싶지 않지만 참아내며 해낸다. 둘째인 금옥은 혜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가부장제하에서 교육받았을 거다. 혜영이 가진 책임감만큼은 아니더라도 둘째의 부담도 있었을 거다. 셋째 금희도 어떤 부분에서 마찬가지고. 그런데 금옥과 금희는 위에서 누르고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상황이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웬만하면 싸우지 않는 유한 성격이 만들어졌을 거다. 그 반면 혜연은 네 자매 중 막내인데 장남이 태어나면서 사랑을 뺏겼다. 가족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 전략을 짠 게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을까. "왜 아들만 챙기냐, 나도 챙겨라." 하는 식이었다가 성인이 되고 자아가 형성됐을 때 보다 확장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 가족 내에서 형제자매 관계는 어떻게 되나.
장리우 첫째다. 삼 남매 중 막내는 남동생이라 혜연과 비슷한 입장이다. 아버지도 가부장적이라 아들에게 집중되는 게 많았다. 극 중 혜연이가 큰집에 반항하고 전 여자친구를 임신시킨 승락이를 때리고 몰아붙이는 행동을 할 때 이해가 됐다. 나도 어릴 때 많은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세대는 아들한테 더 맛있는 걸 주고, 학원도 아들만 보내주는 차별적인 문화가 있지 않았나. 나도 학원에 못 갔다. 그래서인지 내가 살아남으려면 장녀고 뭐고 중요하지 않고 내 인생을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살았지만 지금도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장녀부터 찾는다.(웃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혜영처럼 달려가게 된다. 나 역시 피할 수가 없다. 개인으로 산다고 분리되지 않고, 가족은 어쨌든 연결돼 있다.

공민정 나도 장녀고 여덟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부모님이 동생에게 요구하는 지점과 내게 요구하는 지점이 달랐다. 같은 자식인데 내게 주어진 부담이 더 컸다. 불합리하고 이상하다고 느꼈고 반항심이 많이 들었다. 어릴 때 혜연이처럼 과한 행동을 많이 했다. 나 좀 보라고, 또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래도 안 보더라. 여전히 우리 집은 동생과 나의 역할이 다르다. 부모님 세대는 여태 고착된 부분이 많지만 나는 우리 세대가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는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한다.

공민정 배우는 전작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언니 김은영을 연기했다. 김은영은 성 역할과 생애주기에 따른 고정관념을 거부하며 비혼으로 사는 인물이다. <이장> 역시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다루는 영화라 공통점이 있다.
공민정 여성 서사는 언제나 재밌다. 내가 여자라 공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다 떠나서 <이장>의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82년생 김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본을 읽었을 때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꼭 하고 싶었다.



3대에 걸친 남성 캐릭터들도 흥미롭다. 큰아버지는 가부장제 그 자체 같고, 승락이는 무책임한 남성이며, 혜영의 아들은 골칫덩이다. 어떻게 세 남성 캐릭터를 구상했나.
정승오 삼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 남매와 윤화를 우리 세대로 두고, 위아래에 큰집과 동민이가 있는 구조다. 큰집은 70년 이상 가부장제를 지켜왔고, 생존하기 위해 무너져가는 그것을 지켜가려고 하는 세대다. 그 밑의 승락이는 자라면서 어쩔 수 없이 집안에서 체화해왔을 거다. 나도 그런 면이 있다. 세상이 변해야 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관성으로 멈춰 있다. 혜연처럼 목소리 내기가 쉽지 않다. 승락이도 극 중 큰아버지에게 순응하고 거기에서 열패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동민이는 바람이 많이 들어간 캐릭터다. 우리 아래 세대다. 그 세대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서 최대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때문에 일부러 혜영의 남편을 부재한 걸로 설정했다. 동민이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계속 궁금해하고 찾는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묘 이장 과정에서 결국 아버지가 부재하다는 걸 직감하고 변한다. 어리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약간의 고민을 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가장 먼저 가부장제와 작별해야 하는 존재는 남성이다. 여성은 이미 가부장제와 이별을 주장해왔고 멀어지기 위해 나름의 무언가를 늘 해왔다고 생각한다. 정작 가부장제를 놓지 않고 끌고 가는 건 남성들이다. 남성 캐릭터들이 동생이자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인 존재를 이장함으로써 가부장제와 작별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공민정 셋 다 가부장제라는 관성이 배어 고착된 캐릭터들이다. 남성에게 과한 책임감을 부여하고 여성은 조력하는 존재라는 고정관념이 있지 않나. 어떤 남성들에겐 원치 않는데 과한 남성성이 강요된다. 그렇다고 가부장제의 희생양은 아니다. 극 중 큰아버지가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자라고 하면 승락이는 원치 않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장리우 영화 속 모든 남자들이 내가 현실에서 봐왔던 캐릭터다. 여자와 남자의 성별을 떠나서 인간은 자신만의 캐릭터가 있다. 책임감은 높은 사람이 있고 어리숙한 사람이 있다. 과도한 책임감이 어떤 남성이나 장녀들에게 주어지지만, 성별이 구분되지 않고 그 사람이 태어난 대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혜영은 힘든 티를 안 내지만,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선 힘들다. 그래서 혜영은 이제 시작인 거 같다. 아들을 그 전의 남자처럼 안 키우고 어떻게 한 개인으로 성장하게 할 것인지 고민할 거다.

정승오 큰아버지에 대해 부연하고 싶다. 누구든 개인의 의지로 가부장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교육받으며 자란다. 큰아버지 역시 70년간 가부장의 역할을 강요받았고 생존하기 위해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조금씩 알을 깨고 있는 거 같다. 윗세대가 완전히 불변하기보단 변화해야 함을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과도기의 인물이라고 본다. 큰아버지도 이장 이후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식구들과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가 고착된 상황에서 살아갈 거라 단정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장리우 그래서 남성들이 우리 영화를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장>은 어떤 영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모인 네 자매 혜영(장리우), 금옥(이선희), 금희(공민정), 혜연(윤금선아)은 "장남 없이 어떻게 무덤을 파냐"라는 큰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무책임한 장남이자 막내인 승락(곽민규)을 찾으러 간다. 우여곡절 끝에 데려온 승락은 큰아버지의 은근한 압박에 굴복해 다시금 이장을 반대하는 화두를 비치고 네 자매는 과거의 상처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떨어져 살아온 시간만큼 멀어진 마음들이 말을 타고 가까워지고, 죽을 만큼 밉고 너무 달라서 이해할 수는 없어도 결국 가족이란 명제에 도달한다.


양수복
사진 김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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