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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1 에세이

어떤 역주행들

2020.02.25 | 무키무키만만수, 양준일

얼마 전 유튜브에서는 인디 밴드 '무키무키만만수'의 7년 전 라이브 영상이 은근히 화제였습니다. 그걸 보고 무척 반가워서 평소라면 좀처럼 달지 않던 댓글도 쓸 수밖에 없었죠. 영상에는 2013년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2020년에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인류에겐 아직 너무 빠른 노래'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저도 어느 누구에게도 추천해본 적 없습니다.) 틀자마자 대표곡인 <남산타워>가 흘러나왔습니다. 메인 보컬 만수가 쿵짝쿵짝 반주에 맞춰 "넌 망한다 망한다 망한다 무너진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은 박수를 칠까 화를 낼까 망설이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표정마저 예술적이라 저는 몇 번을 돌려봤습니다. 순식간에 조회 수가 30만 회를 넘었는데, 역병과 함께 시작된 2020년에 꼭 어울리는 역주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젠가부터 역주행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영 어색했습니다. 원래라면 마땅히 잊히고 망했어야 할 무언가가 '운 좋게', '대세를 거슬러' 다시 주목받는다는 듯한 어감 때문에요. 최근 음원 사재기 논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음원 차트가 실제로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잖아요. 이제는 첫 끗발이 곡의 운명을 좌우한다지만, 음악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아티스트가 죽고 나서야 빛을 본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유튜브도 없고 멜론도 없던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 흔했죠. 노래를 알릴 수단은 한정돼 있었고, 대중이 곡을 수용하는 태도도 훨씬 느리고 보수적이었으니까요. 발표 당시에 '방송국 놈들' 눈에 들지 않아 묻혀버렸지만, 지금 우리가 '띵곡'으로 알고 있는 1980-90년대 노래들은 '길보드 차트'를 역주행해 우리에게 닿은 곡이 대부분입니다.

직캠을 통해, 온라인 탑골공원을 통해, 음악 방송을 통해 꽤 많은 역주행의 아이콘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양준일입니다. 미국에 살며 식당에서 서빙을 하다가 쉰이 넘어서 나타난 그를 봤을 때 대단한 보컬리스트라거나 훌륭한 댄서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주행이 단순히 '운 좋게' 얻어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다시 무대에 세운 것은 '방송국 놈들'이기 전에 대중이었고, 본인의 절실함이기 전에 팬들의 간절함이었으니까요.

20대의 가수 데뷔는 어쩌면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큰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한 데 대한 자책과 주변에 대한 원망이 왜 없었을까요. 그런데 그는 그때의 자신에게 주저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 그 말을 들으며, 어쩌면 그는 긴 시간 동안 그의 인생을 정주행해서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역주행의 묘미는 시대를 거스르는 일에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이 말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총선 시즌이니까요. 마땅히 잊히고 망했어야 할 자들이 운 좋게, 대세를 거슬러 자리 하나 차지할 수 있을까 싶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역주행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성추행, 학력 위조, 부동산 투기… 포털 사이트에 이름 한 번만 쳐도 의혹이 수두룩하게 검색되는데 부끄럽지도 않을까요. 역주행은 원래 찻길에서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는 뜻인데,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이 왜 이렇게 많을지 모를 일입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4년마다 잘만 나오는 저 얼굴들을 보면 양준일의 30년은 무엇이었나 제가 대신 부끄럽기도 하고요. 그런 자들에게 난생처음으로 무키무키만만수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추천합니다. 제대로 좀 살라고요.

(쿵짝쿵짝)'지켜보고 있다',
'넌 망한다 망한다 망한다 망한다 무너진다
넌 망한다 망한다 망한다 망한다 무너진다'
(지금 제 표정을 보여줄 수 없어 안타깝네요. 쿵짝쿵짝)


이진혁
출판편집자. 밴드 '선운사주지승'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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