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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9 인터뷰

연남동 연필 가게 '흑심'

2020.01.21 |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비 오는 날, 옛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연필은 육각형 모양을 자주 썼던 것 같은데 글씨는 왜 '사각사각' 하고 써지는 건지, 마치 사랑처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하니까~' 마음 공책에 꾹꾹 눌러쓴 건, 코끼리 지우개로 열심히 지워봐도 자국이 남지 않을까요?
노래가 끝나고 '연필'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남동의 어느 작은 연필 가게를 찾아갔지요.
그곳에 가면 왠지 고민하던 것들이 다 풀릴 것 같았거든요.


작은 연필 가게 '흑심'은 어떤 곳이에요?
박지희 저희(박지희, 배유나 공동대표)가 좋아해서 모아오고 있는, 연필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만든 공간이에요. 저희의 수집품도 볼 수 있고, 그중 일부를 구매하실 수도 있어요. 오셔서 직접 연필에 대한 것들을 경험해보실 수도 있고요.

'흑심'의 영어 표기가 'Black Heart'로 쓰인 게 재밌어요. 중의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백유나 네, 중의적인 표현이 맞아요.
박지희 연필의 흑심을 상징하기도 하고, 흑심을 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짓고 싶었는데, 연필 가게 이름이 '흑심'이라는 것에 재밌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서 뭐 하세요?'
박지희 오픈은 2시부터 하지만, 저희는 일단 10시에 출근해요. 수집과 판매하는 연필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이 매일 있어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정이거든요. 오후 2시부터 7시까지는 손님들이 다녀가시고, 그 외에는 다른 업무도 봐요. 저희는 하루 반나절 이상을 여기서 보내요.

'흑심' 외에 다른 일도 하고 계세요?
박지희 '흑심'은 가게이자, 저희가 운영하고 있는 디자인 회사인 '땅별메들리'의 프로젝트라고 보시면 돼요.
백유나 땅볕메들리(지구의 순우리말인 '땅별'과 여러 가지가 섞여 있음을 의미하는 '메들리'를 조합)는 이름 그대로, '지구에 있는 여러 가지를 디자인하자'는 의미로 지었어요.
박지희 저희가 디자인 소품을 많이 만들어왔는데, 지금은 연필을 주로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연필하고 어울리는 문구 제작을 늘려가고 있지요.

어떻게 연필을 모으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백유나 맨 처음에는 연필이 아니라, 연필을 담아 파는 종이 상자에 반했어요. 'Othello'라고 써진 패키지인데 빈티지한 느낌이 좋았어요.
박지희 저희가 모으고 있는 패키지의 형태가 정말 다양해요. 요즘에는 연필과 패키지가 거의 획일화되었지만, 예전 연필의 전성기에는 브랜드들이 많이 투자했었기에 지금하고는 완전 달랐죠.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디자인도 다양하고, 연필이 휴대성을 갖추게 되면서 액세서리의 역할도 했어요.
백유나 저희가 예쁜 것을 좋아하니까 패키지를 모으다가, 연필마다 각인이나 페룰(연필과 지우개를 잇는 이음새) 같은 부분의 디테일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점점 연필의 매력에도 빠져들면서 수집하게 되었어요.

연필을 모으는 '흑심'의 취향과 기준이 있나요?
박지희 일단은 사용 가능한 연필이어야 해요. 연필을 보관할 때 습도나 온도가 잘 맞지 않은 경우에는 뒤틀리거나 갈라지거든요. 연필은 보관만 잘 하면 오래되어도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어요.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에는 저희가 모으지 않아요. 예전에 연필을 만들었던 브랜드들은 생산 시기에 따라 로고가 바뀌기도 해서 수집하는 재미가 있어요. 시대 상황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연필의 형태가 변화하기도 하고요. 브랜드 제품이라도 보급형 모델은 많이 모으지 않는데, 이왕이면 스토리가 있는 연필을 수집해요. 또 디자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색깔이나 형태가 독특한 것은 가능하면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사용 빈도가 높은 경도(연필심의 단단한 정도)의 연필을 주로 수집해요. 사용 빈도가 낮은 7~8H는 피하고 있어요. 저희는 연필을 수집하기도 하지만, 수집하는 연필의 대부분을 직접 사용하거든요.

수집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박지희 저희가 직접 여행을 다니면서 구하는 경우도 있고, 해외에는 빈티지 연필에 대한 수요도 많고 그만큼 수집가들도 많기 때문에 그분들과 거래하기도 해요. 필요할 때는 인터넷에서 경매를 하기도 해요. 우연한 기회에 얻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오래된 문방구에서 얻기도 하고요.

수집 과정에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박지희 88 서울올림픽 기념 연필이 있는데, 그 호돌이 연필을 미국에서 구했어요.
백유나 우리나라 연필인데.(웃음)
박지희 동아연필에서 만들었어요.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저건 어떻게든 구해야겠다 싶었어요.
백유나 대부분 다 힘들게 구했어요.
박지희 시공간을 초월해서.(웃음) 항상 우연히 마주치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해요. 저기 있는 아이보리색 연필 진열대도, 공덕역 쪽에 있는 30년 넘은 문방구에서 우연히 구했는데, 원래 파는게 아니었어요. 저희가 방문했을 때 문방구 사장님께서, 2주 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오래된 문방구로 소개되면서, 오래된 문구나 장난감을 수집하시는 분들이 이미 다 쓸어가셔서 가져갈 게 없다고 하셨어요.
백유나 사장님이 저희에게 찾을 수 있으면 들어와서 찾아보라고.(웃음) 제일 구석 안까지 들어갔어요.
박지희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찾았는데, 어떤 진열대가 갖고 싶어서 거기에 꽂혀 있는 문구까지 다 구입했어요. 안 나오는 펜도 많았는데, '이거 다 사면 진열대도 같이 주실 수 있나요?'하면서 거래했죠.


오래된 연필을 사랑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박지희 연필에 담겨 있는 이야기 때문이에요. 손님에게 연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아까워서 못 쓰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처음에는 그게 아쉽다고도 생각했어요. 저도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 쓰지 못하지만, 쓰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샀을 때의 그 황홀함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있거든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빈티지 연필은 누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가 가질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써도 좋고 안 써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생기는 가치도 있다고 생각해요. 빈티지 연필은 더욱,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소중히 지켜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저희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고요.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친한 친구에게 '우리 어떻게 친해졌지?'라고 물어보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흑심'은 어떻게 연필과 친해졌는지 기억하나요?
박지희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연필 깎는 것을 좋아해서 반 친구들 연필을 다 깎아주고 그랬어요. 연필 깎는 데 자부심을 느꼈거든요.(웃음) 수업 시간에 연필만 깎아서 선생님께 혼난 적도 있어요. 저희 때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연필을 사용해야 했고, 중학교 때부터 샤프를 허용하는 그런 때여서…
백유나 저는 아니었는데.(웃음)
박지희 우리 학교만 그랬던 것 같은데.(웃음) 그때는 샤프를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샤프를 쓰다 보니까 연필 깎는 것에 재미가 생겨서, 연필을 깎고 다듬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닳지도 않았는데 계속 깎고 그랬어요.
백유나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샤프를 많이 썼던 것 같고. 대학교 다닐 때, 그림을 그리면서 연필과 친해지게 된 경우예요. 그때부터 연필을 꾸준하게 썼어요. 저는 딱히 연필 깎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아서.(웃음)
박지희 얘는 잘 못 깎아요.
백유나 그래서 연필깎기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지 말고 취미로 해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덕업일치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박지희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
백유나 저도요.
박지희 왜냐하면 덕업일치가 되면 가장 좋은 건, 덕질을 많이 하는 것에 죄책감이 별로 없다는 거?(웃음) 구매하는 데 상한선이 없다는 건, 단점을 다 이길 수 있는 장점이잖아요.
백유나 덕질을 일로 하니까 즐거워요.


지금 가장 좋아하는 연필이 있나요?
백유나 지금은 사라진 Vintage Venus Pen & Pencil Corp. 연필인데, 심이 같은 경도에 비해서 조금 얇아요. 그래서 더 얇은 글씨를 쓸 수 있어요. 마모도도 좋고. 아무리 써도 계속 얇은 글씨를 유지할 수 있어서 요새 많이 쓰는 연필이에요.
박지희 요즘 가장 많이 쓰는 연필 중 하나인데, 이것도 지금은 사라진, Eberhard Faber 브랜드예요. 필감이 정말 좋아요. 저는 각진 연필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각진 연필은 쓰다 보면 손가락이 아파서 불편해요. 그런데 오래된 연필은 각진, 날이 살아 있는 연필이 많거든요. 페룰 디자인도 예쁘고, 저희가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연필 가운데 하나예요.

연필은 일종의 아날로그이고 요즘은 '쓴다'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흑심'이 생각하는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박지희 연필을 깎고 심을 다듬는 순간부터 '쓴다'에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깎을 때 느껴지는 나무 향과 반듯하게 깎은 연필이 종이에 닿는 느낌은 오로지 연필에서만 느낄 수 있잖아요. 연필을 끄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가치를 다듬을 수 있죠. 이처럼 '연필을 쓴다'라는 것은 깎고, 다듬고, 쓰고, 지울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의미해요.

몽당연필을 가져가면 새 연필로 바꿔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잖아요.
박지희 몽당연필이 저희에게 많이 없어요. 판매하는 연필은 저희가 직접 써봐야 추천을 할 수 있으니까 다 써봐요. 그래서 매번 연필을 바꿔가며 사용하기 때문에 연필이 짧아질 기회가 별로 없어요.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쓰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에요. 저도 그렇고, 몽당연필을 사용하시는 분들 중에는 성취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어요. 반면에 처치 곤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겠죠. 7cm 이하 연필은 기부도 받지 않아서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서로서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1:1 방식으로 교환하고 있어요. 수집을 좋아하는 저희는 몽당연필도 좋아해요. 긴 연필이 짧아진 모습이 귀여워요. 그리고 사용자가 어떻게 썼는지 보이는 경우도 많아요.
백유나 이빨 자국도 있고, 연필을 어떻게 깎아서 썼는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썼나 싶을 정도로 짧은 연필도 있어요. 이름을 쓴 자국이 있기도 하고, 그런 흔적들이 좋아요.

'흑심'이 고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꼭 지키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해요.
박지희 시필용 연필을 꼭 제공하기. 저희도 써보면서 느끼지만, 같은 경도여도 브랜드마다 느낌이 다르고, 같은 브랜드여도 생산 시기, 공장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다 달라요. 저희가 추천해드리기도 하지만 직접 써보시고 고르시기를 권해요. 사람에 따라서 연필도 취향을 타거든요.
그리고 판매하고 있는 연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기. 정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많이 달라요. '흑심'의 연필은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수집한 것이 아니고, 저희 나름의 기준으로 큐레이션 한 연필이기 때문에 설명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필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그래서 연필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특별하게 느껴지는데, 손님들에게도 같은 느낌을 전달해드리고 싶었어요. 저희만 알고 있기 아까운 이야기가 많거든요. 처음에는 '귀찮아하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했어요. 계산하는 데 오래 걸리거든요.(웃음) 그래도 경청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오히려 저희도 신기하고 감사해요.

연필을 쓰는 건 이제는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가 된 것 같아요. 요즘에는 연필이 일반적이지 않고,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연필에 '흑심'을 품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요.
박지희 연필을 좋아하는 우리의 취향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시작하였고, '흑심'을 통해 새롭고 재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어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연필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쓰고, 보면서 '연필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요. 그 어떠한 필기구도 절대 연필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확신해요. 그렇기 때문에 연필의 부활을 믿고,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흑심이 하는 작업들이 연필의 부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조은식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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