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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3 스페셜

내 친구의 집은 어디 있긴 있는가

2019.10.17 | 청년 주거 대안


예쁜 집, 편한 집, 근사한 집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더 좋은 집이 아니라 덜 나쁜 집을 찾아, 최선이 아닌 차악의 주거 공간을 선택할 수밖에 이유는 매우 명확하고 단순하다. 가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소공녀>에서 집은 포기해도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선배 언니는 말한다.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염치란 무엇일까. 가진 집이 없고 가진 돈이 없는 사람이라면 외출할 때 상시 챙겨야 하는 신분증 같은 것일까?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라 불리는 의식주를 영위하는 일에 영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면, 늘 부끄럽고 면목 없는 태도를 가져야만 염치가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서울시의 첫 역세권 청년주택 사업이 이른바 ‘5평 논란’에 부딪혔다. 어느 트위터 이용자가 올린 글로부터 촉발된 논쟁인데, 그의 글을 요약하자면 “청년주택을 살펴보니 대부분 5평(16㎡) 내외의 원룸이었다며, ‘사회 초년생이니까.’ ‘시세보다는 저렴하니까.’ 등의 말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좁고 작은 방에 살아도 ‘괜찮은’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에 공감하며 16㎡, 즉 5평 수준의 주택은 한 사람이 살 만한 인간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충정로와 강변 등 역세권 지역에 비교적 저렴한 금액으로 살 수 있다면 그 크기에 대해서는 감히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주거 경험을 고백하며 5평이 좁다 말하는 건 배부른 소리라고 혹은 4~50만 원은 거뜬히 내야 할 집을 10만 원대의 월세로 구할 수 있다면 그걸로 감지덕지하라는 말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엄밀히 말해 청년임대주택의 5평 남짓의 공간은 법적으로 용인된 크기이다. 국토교통부가 주택법에 근거에 2011년 5월 개정한 ‘최저주거기준’을 보면, 1인 가구의 최소 주거 면적은 14㎡이기 때문이다.(개정 전에는 12㎡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법으로 정해진 최저 기준이 현실의 우리에게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역세권 청년주택에 대한 경쟁은 이미 치열한 상황이다. 서울 구의동과 충정로의 ‘역세권 청년주택’ 2019년 제1차 입주자 모집공고를 보면, 공공임대주택의 경우 16㎡형은 대학생, 17㎡형은 청년, 35㎡(10평)형은 신혼부부만 신청할 수 있는데, 접수 첫날 경쟁률만 해도, 구의동 공공임대주택이 50.4대 1, 충정로 공공임대주택이 45.9대 1에 달했다고 한다.


이 공공임대주택에 당첨된 대학생·청년들은 약 1700~2200만 원의 보증금과 7~10만 원의 월세를 내고 살게 되는데, 서울 지하철 역세권인 충정로와 강변에서 이 정도 수준은 파격적인 혜택이라 할 수 있다. 다소 부담이 되는 보증금도 시 차원에서 무이자로 임차 보증금을 빌려주는 등의 방안도 내년 입주 전까지 마련할 예정이라고 하니, 이곳에 살게 될 청년들에게는 든든한 지원책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또 하나 발생한다. 충정로역 청년주택의 경우 499실 중 49실, 강변역 청년주택의 경우 84실 중 18실만이 공공임대주택으로 제공된다. 앞으로 더 공급할 예정이라곤 하지만, 당장의 청년 주거 빈곤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어찌 보면 1인당 주거 공간의 크기의 문제에 앞서, 당장 공공임대주택의 세대수 자체가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집값은 단기적인 오르내림은 있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꾸준히 상승해왔다. 특히 모든 사회 인프라가 집중된 서울의 경우는 매우 큰 폭의 상승을 이어왔다. 2019년 9월 기준으로 서울 25개 자치구 아파트 평균 중위 가격은 8억 7000만 원대에 진입했다고 한다.(KB국민은행 리브온 월간 부동산 통계) 결국 서울의 모든 집을 쭉 늘어놓았을 때 그래도 중간 정도의 집을 사려면 8억 7000만 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연봉 3~4천만 원 정도의 다수의 직장인은 영영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경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 집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나 꿈을 꿔볼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기분마저 들 수 있다.


경제가 고성장하던 시기에는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서, 대출을 얻어 집을 사고, 또 그 집의 가격이 올라 대출금을 갚거나 추가 이익을 얻는 구조로 주거의 사다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현재는 경제생활의 출발점인 일자리를 구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으니 그 이후의 대출이나 내 집 마련 같은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끝이 보이는 고난은 참을 만한 명분이 있다. 내 한 몸을 겨우 뉘일 만한 작고 열악한 공간이 청년 시절에 한정되어 겪는 과정이라면 낭만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한 청년이었던 내가 가난한 장년을 거쳐 노년이 될 것이라는 불안이다. 나의 5평짜리 집을 청년이 지난 아주 먼 훗날까지도 쉽게 ‘탈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의 미래가 볕이 잘 들지 않는 집만큼 어둡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은 버릴 수가 없다. 아직 충분하진 못하더라도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다양한 청년 주거 정책이 의논되고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걸어본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과 의견을 표해야겠다는 의욕도 품어본다.


혹은 서울을 떠나 터전을 마련하거나, 기존의 보편적인 주거 체제를 벗어난 공간의 공유와 같이 나름의 방식으로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서도 가능성을 엿본다. 문제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며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이들에게서 새로운 해결책이 등장할 수도 있다.

얼마 전 청년 행복주택에 입주를 친구를 만났다. 물론 친구에게 이번의 입주가 자신을 둘러싼 주거 불안의 깊고 견고한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거나 할 수 있는 대단한 기회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기회가 한 청년의 일상의 경쾌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분기점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장의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아주 미미하게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징후, 의지할 만한 제도가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집의 조건을 하나씩 포기하는 일에 익숙해지기보다는, 꿈꾸는 집의 풍경을 하나씩 더해볼 수 있는 청년들이 많아지기를, 자신이 버는 수준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쉴 수 있는 즐거운 나의 집을 찾아내는 것이 비참하거나 슬프기보다는 설레고 희망적인 일이 될 수 있기를. 내 친구의 집에 건투를 빈다.

Writer 김희진

  • 사기병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나는 살아 있다.

  • 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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